"우리가 작정하고 빼돌린 사람들의 재산을 추적해서 민사로 환수받기 어려워요. 이미 모든 변호사들도 안된다 못한다며 손 뗐어요. 이 상황에서 나라는 아무것도 안하고 있잖아요. 어떻게 해야 될까요. 사람이 계속 죽어나가는데. 얼굴을 보던 사람도 죽는데…어떻게 해야 하죠"
최근 두 달 사이 이른바 '건축왕'으로부터 전세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한 청년 3명이 잇따라 숨지는 사태가 이어지는 것을 보고 17일 안상미 인천 미추홀구 전세사기 피해대책위원장이 한 말이다.
있지만 받을 수 없는 '신기루' 같은 지원 대책
안 위원장은 이날 오전 숨진 전세사기 피해자 A(31․여)씨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았다고 말했다. 전세사기 피해자들은 A씨가 평소 주변 피해자들을 위로하며 어려움을 함께 극복해보자고 힘쓰던 사람이었다고 기억했다.
전세보증금 9천만원을 돌려받지 못한 A씨는 전세피해지원센터가 아닌 법률구조공단의 도움을 받고 건축왕 일당과 민사재판을 준비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전세피해지원센터 지원을 받으려면 주거지가 경매로 낙찰돼 이사를 해야 하는 상황이어야 했는데 A씨는 그런 상황이 아니었다.
추가 대출을 받고 싶어도 기존 대출금도 상환할 수 없는 A씨에게는 '그림의 떡'이었다. 총 대출금 3억원 이하·가계 소득 7천만원 이하라는 정부의 저리 대출 지원 자격이 이미 정부가 운영하던 '버팀목 전세자금 대출 조건'과 동일했다. 즉 정부가 같은 조건의 대출을 한 번 더 해준다고 한 것인데 기존 대출금도 갚지 못하는 상황에서 추가 대출이 승인될 가능성이 낮았다.
정부의 지원대책은 요원한데 건축왕 일당에 대한 민사재판 역시 쉽지 않았다. 지원대책은 분명히 있지만 받을 수 없는 '신기루' 같은 지원책이었던 셈이다. 안 위원장은 "사실상 정부가 이 대책을 냈다고 말하지만 방관한거나 다름 없다"며 "지금이라도 피해자들이 보증금을 되돌려받을 수 있거나 안심하고 거주할 수 있는 실효성있는 근본적인 대책을 내줘야 한다"고 말했다.
정치권도 같은 요구를 하고 나섰다. 더불어민주당 민생경제위기 대책위원회도 이날 성명을 내 "정부가 보증금만이라도 온전히 돌려받을 수 있는 방안 마련에 적극 나서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들은 "정부가 주택도시기금에서 먼저 피해구제를 한 뒤 향후 악성 임대인 재산 추적 등 적극 개입하는 '선 지원 후 구상권 청구' 등의 방안을 모색하거나 관련 정부부처가 모두 참여하는 범정부 TF를 구성해 가용한 방안을 모두 모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두 달 새 3명' 전세사기 피해자들 잇따라 사망 잇따라
최근 숨진 전세사기 피해자들은 모두 주택임대차보호법의 사각지대에 있었다. 이 법에 따라 소액임차인은 전셋집이 경매 등에 넘어갔을 때 일정 금액의 최우선변제금을 보장받지만 이들은 전세금 증액 '꼼수' 탓에 이조차 제대로 적용받지 못했다.
대책위 등에 따르면 이날 숨진 채 발견된 피해자 A(31·여)씨가 살던 아파트는 통째로 지난해 임의 경매(담보권 실행 경매)에 넘어갔다. A씨는 2019년 보증금 7200만원에 전세 계약을 맺었으나 2021년 9월 임대인의 요구로 재계약을 하면서 보증금을 9천만원으로 올렸다. 2019년 최초 계약 당시 A씨는 소액임차인 조건인 전세보증금 8천만원 이하였기 때문에 경매로 집이 넘어가더라도 최우선변제금 2700만원은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2021년 재계약 시점에서는 주택 임대차 보호법 적용 대상에서 제외됐다.
지난 14일 숨진 피해자 B(26)씨가 살던 아파트도 전체 136세대 가운데 85세대가 경매에 넘어갔다. B씨 역시 2021년 8월 재계약을 하면서 6800만원이던 전세금을 9천만원으로 올려준 상태였다. 이에 주택이 낙찰되더라도 최우선변제금 3400만원 외 나머지 5600만원은 받을 수 없었다.
앞서 지난 2월 28일 미추홀구 빌라에서도 보증금 7천만원을 받지 못한 C(39)씨가 사망했다. 그가 살던 빌라의 소액임차인 전세금 기준액은 6500만원이었다. C씨는 겨우 500만원 차이로 최우선변제금을 보장받지 못했다.
결국 C씨는 '전세사기피해대책위에서 많은 위로를 얻었지만 더는 못 버티겠다. 자신이 없어'라며 '뭔가 나라는 제대로 된 대책도 없고…이게 계기가 돼서 더 좋은 빠른 대책이 나왔으면 좋겠다'는 유서를 남기고 숨졌다.
미추홀구의 한 부동산업계 관계자는 "미추홀구 전세사기 사건의 피해 주택들은 모두 준공과 동시에 근저당권이 설정된 집이기 때문에 제대로 된 공인중개업자라면 전세보증금이 최우선변재금 수준인 2700만~3400만원을 넘어가면 계약하지 말라고 만류했어야 했다"며 "앞으로 누가 공인중개업자를 믿고 부동산 계약을 하겠는가"라고 말했다.
피해자들 "대출도, 긴급주거 지원도 모두 그림의 떡"
정부가 지난달 발표한 추가 지원책에는 경매 절차가 끝나야만 받을 수 있던 전세사기 피해확인서 발급을 앞당기고 긴급주거 주택의 6개월치 월세 선납을 없애는 내용이 담겼다. 피해확인서가 있어야 저리 전세자금 대출과 긴급주거 지원을 받을 수 있는데, 대출은 최대 3억원 이하 전셋집까지 가구당 2억4천만원을 연 1~2%대 금리로 지원하기로 했다.
그러나 이 같은 대책 보완에도 불구하고 A씨와 B씨 모두 전세사기 피해확인서를 발급받지 않았다. 확인서가 있는 피해자만 저금리 전세자금 대출이나 긴급주거 중 하나를 지원받을 수 있다. 대책위는 이들이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아 확인서를 받지 않은 것으로 보고 있다.
이 중 저금리 전세자금 대출은 소득·자산 기준을 충족하는 무주택 피해자가 새로운 전셋집(보증금 최대 3억원 이하)에 입주하는 경우에만 받을 수 있어 요건이 까다롭다. 긴급주거 지원 역시 정부가 추가 대책을 내놓으며 6개월 치 월세 선납 조건을 없앴지만 주택 규모나 생활 여건 등의 이유로 피해자들이 입주하는 사례가 많지 않다.
인천시에 따르면 이날 기준 인천에 있는 긴급주거 임대주택 238호 가운데 전세사기 피해자들이 입주한 세대는 8호에 불과하다. 지난달 초 피해대책위가 추산한 미추홀구의 전세사기 피해 빌라·아파트만 118개 동 3131세대에 달하는데 이 가운데 긴급주거 지원을 받은 세대는 극소수인 셈이다.
숨진 A씨의 이웃은 "20평에 살던 다른 경매 낙찰 세대가 긴급주거 지원을 받으려고 집 3곳을 둘러봤는데 한 곳은 원룸, 한 곳은 엘리베이터가 없는 5층 집, 한 곳은 도심과 먼 나홀로 주택이어서 들어가지 않았다고 한다"며 "피해자들의 실거주 요건에 맞는 긴급주거 주택이 적은 것 같다"고 설명했다.
전세사기 피해자 전국대책위 결성…18일 발족
전세사기 피해자들은 이 같은 정부 대책이 당면한 문제를 유예하는 방안에 불과하다며 18일 전세사기·깡통전세 피해자 전국대책위원회를 출범하기로 했다.
이들은 국토교통부·법무부·기획재정부·행정안전부 등이 참여하는 범정부 전담팀(TF) 구성, 전세사기 주택 경매 일시 중지, 선지원 후 전세 사기범에게 구상권 청구 등의 근본적인 대책을 촉구하고 있다. 최근 두 달 사이 인천에서 숨진 20~30대 청년 3명은 수도 요금조차 내지 못하는 등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리기도 했다.
이에 17일 유정복 인천시장, 이원재 국토교통부 1차관, 이영훈 미추홀구청장 등은 미추홀구청에서 긴급 회의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유정복 시장은 전세 사기 피해자들을 위해 현재 경매가 진행 중인 주택에 대한 경매 유예, 경매 시 피해자 우선 매수권 부여, 대출한도 제한 폐지, 긴급 주거지원에 따른 이주비 지원 등 특단의 대책을 마련해 줄 것을 정부에 건의했다.
이와 함께 인천시는 피해자 가구에 대한 단전·단수 유예, 심리상담 지원을 병행하기로 했다. 그러나 피해자들은 '사후 약방문'이라고 비난하고 있다.
한편 건축왕 C(61)씨는 공인중개사 등과 함께 지난해 1~7월 미추홀구 일대 아파트와 빌라 등 공동주택 161채의 전세 보증금 125억원을 세입자들로부터 받아 가로챈 혐의 등으로 구속 기소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