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과 아픔을 지닌 이들에게 그날, 그 장소의 기억은 대부분 빛을 잃은 채일 거다. 그런 우리에게 신카이 마코토 감독은 조심스레 제안한다. 그날, 그곳에 존재했던 사람들을 기억하며 지금 있는 사람들의 애정 어린 손을 붙잡고 직면해보자고 말이다. 그러면 그곳에 절망이 아닌 '희망'이 있을 것임을, '스즈메의 문단속'을 통해 보여준다.
규슈의 한적한 마을에 살고 있는 소녀 스즈메(목소리 하라 나노카)는 문을 찾아 여행 중인 청년 소타(목소리 마츠무라 호쿠토)를 만난다. 스즈메는 그의 뒤를 쫓아 산속 폐허에서 낡은 문을 발견한다. 스즈메가 무언가에 이끌리듯 문을 열자 마을에 재난의 위기가 닥쳐오고, 가문 대대로 문 너머의 재난을 봉인하는 소타를 도와 간신히 문을 닫는다.
재난을 막았다는 안도감도 잠시, 수수께끼의 고양이 다이진(목소리 야마네 안)이 나타나 소타를 의자로 바꿔 버린다. 이후 일본 각지의 폐허에 재난을 부르는 문이 열리기 시작하자 스즈메는 의자가 된 소타와 함께 재난을 막기 위한 여정에 나선다.
규슈, 시코쿠, 고베, 도쿄 등에서 재난을 막기 위해 일본 전역을 돌며 필사적으로 문을 닫아가던 중, 어릴 적 고향에 닿은 스즈메는 잊고 있던 진실과 마주하게 된다.
'스즈메의 문단속'은 신카이 마코토가 그동안 작품을 통해 보여줬던 이른바 '신카이 월드'를 집대성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그만큼 동일본 대지진이라는 소재에서 출발한 스토리와 작화, 사운드와 음악이 한데 어우러지며 하나의 마스터피스를 완성했다. '스즈메의 문단속'은 재난의 시대, 상실의 아픔을 간직한 존재를 향한 '신카이 마코토'식 애니메이션 마법을 펼친다.
지난 2011년 일본을 덮친 동일본 대지진과 이로 인한 쓰나미로 막대한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 주인공 스즈메는 동일본 대지진 생존자이자 피해자이자 또한 유가족이다. 그런 스즈메가 또 다른 주인공 소토를 만나 '지진'이라는 재앙을 일으키는 '미미즈'가 현실로 향하는 문을 닫으러 다니는 여정이 '스즈메의 문단속'의 주된 이야기다.
스즈메는 소토를 도와 재난, 즉 지진이란 재해를 막기 위해 '문'을 닫으러 다닌다. 문이란 재앙이 현실로 나오는 일종의 '틈'이다. 이 문을 닫는 데 필요한 힘이 바로 '사람'이다. 재난이 있었던 지역에 존재했던 사람들의 기억, 즉 사람의 마음을 바탕으로 한 힘으로 문을 닫는다. 재난의 시대를 버티고 이겨낼 힘은 결국 사람과 사랑임을 보여준다.
스즈메는 소토를 만나 사랑하는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은 물론 도움을 주는 여러 사람을 만나고, 어쩐지 거리가 생겼던 이모와 다시 가까워진다. 소토에 대한 사랑으로 재난 이후 떠났던 고향으로 돌아가 상실과 아픔의 트라우마를 직접 마주하고 스스로의 재난이었던 과거의 문을 닫는다. 여기서 문을 닫는 것은 일반적인 의미처럼 회피가 아니라 치유와 희망으로 가는 새로운 길을 밟아나가겠다는 의미다.
그런 스즈메가 문단속에 나서는 여정은 곧 내면의 슬픔과 분노 등 내 안의 미미즈를 발견하고 문단속하러 다니는 과정이기도 하다. 미미즈를 막고 문을 닫았던 것처럼 슬픔과 상실로 가득 찬 십 대의 내면을 어루만져주고 그 문을 마주하고 닫을 수 있도록 해주는 건 주변 사람의 애정 어린 마음이다.
이 마음을 바탕으로 스즈메는 결국 다시는 마주할 수 없을 것 같았던 슬픔을 직면하게 된다. 잊어야 했고, 잊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문 너머에 남겨놨던 슬픔이다. 다시금 직면한, 기억 속 검은색으로만 칠해졌던 그날의 장소에서 마주한 뜻밖의 찬란함은 우리가 어떻게 상실을 마주해하고 치유에 이르러야 하는지 보여준다. 미미즈가 사라진 후 나타나는 무지개 빛처럼 재앙 후 남은 것이 재앙만은 아니다. 그 속에서도 '희망'은 존재한다.
이처럼 10대의 내면 여행이자 외적으로는 일본의 재앙 막기 여정을 신카이 마코토 감독은 특유의 따뜻하고 서정적인 색감의 작화와 음악으로 풀어냈다. 스즈메의 여정을 너무 무겁지만은 않게 관객들이 뒤따를 수 있도록 영화 내내 다정함을 잃지 않은 것 역시 감독답다. '스즈메의 문단속'을 통해 또 다른 문을 연 신카이 마코토의 다음 작품이 벌써 기다려지고 기대된다.
122분 상영, 3월 8일 개봉, 12세 관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