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죽는 건 죽어야 할 때, 그때 죽어."
총독부 통신과 암호 전문 기록 담당 박차경은 신임 총독 암살 시도가 있던 날, 행동대원인 '유령'의 죽음을 목격했다. 유령을 잡기 위해 총독 취임식 관련 가짜 전문을 내려 보낸 카이토(박해수)의 덫에 걸려 호텔에 감금된다. 전임 총독에게 비행기를 선물할 정도로 재력가 집안 딸이지만, 차경에게는 목숨보다 소중한 것들이 있다.
드라마와 영화를 넘나들며 자신만의 에너지를 발산해 온 배우 이하늬가 이해영 감독의 신작 '유령'에서는 그동안 보여줬던 캐릭터들과는 다른 결의 박차경을 온몸으로 그려냈다. 감히 가늠할 수조차 없는 깊은 슬픔을 억누르고 또 억누르며 임무를 완수하려는 차경을 이하늬는 절제하고 누르며 그 깊이를 자신 안에 한가득 품었다.
깊은 슬픔에 지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차경으로 이하늬를 떠올렸다는 감독의 말마따나 '박차경은 곧 이하늬'였고, 스크린에 펼쳐낸 차경의 감정들은 버거울 정도로 스크린 밖으로 빠져나와 관객들을 잠식한다. 지난 12일 서울 종로구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이하늬는 차경을 통해 그동안 몰랐던 감정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연기하는 맛'이 있었던 인물, 박차경
이하늬는 이해영 감독으로부터 자신을 염두에 두고 썼다는 말과 함께 '유령' 대본을 받았다. 감사한 마음으로 읽어 내린 대본 속 차경을 만난 순간 그는 '이건 진짜 너무 연기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운명처럼 만난 차경은 조선 최고 재력가의 딸로, 총독부 통신과에서 암호문 기록 담당으로 일하며 남다른 행로에 궁금증을 자아내는 캐릭터다. 그의 내면에는 깊고 깊은 슬픔과 강인함이 공존한다. 그러나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꾹꾹 눌러 담을 뿐 결코 밖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이하늬는 그런 박차경이 일차원적이지 않아서 좋았다. 슬픔이나 분노, 기쁨 등의 감정을 겉으로 쏟아내는 게 아니라 살짝 비집고 나올 수는 있어도 끝끝내 깊게 누르고 누르는 인물이었다.
"슬픔도 그냥 '흑흑' 거리는 슬픔이 아니라 저 밑 동굴 100층까지 뚫려 있는 슬픔이라 생각했어요. 그래서 제가 가진 슬픔으로는 잘 이해가 안 됐죠. 21세기를 살아가는 현재의 저와는 차원이 다른 슬픔을 겪는 캐릭터라, 그런 부분에 계속 집중하며 살았어요. 차경은 잔이 찰랑거릴 정도로 딱 채워진 슬픔으로 살고 있는데, 그걸 절대 쏟지 않고 찰랑이는 감정의 상태를 유지해야 하는 게 조금 고통스럽긴 했어요."
어떤 장면에서 차경을 바라봐도 차경이 자신의 얼굴을 통해 표현하지는 않지만, 그 안에 있는 복잡하고 깊은 감정들이 조금씩은 관객들에게 비치길 바랐다. 이런 차경이었기에 이하늬는 "연기하는 맛이 더 있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비장이 끊긴다'는 슬픔을 온몸으로 경험하게 해준 박차경의 삶
박차경은 목숨을 위협하는 상황 앞에서도 흑색단 동료들을 구하기 위해 어떻게든 살아 나가고자 애를 쓴다. 웬만한 강단이나 사명감 없이 해내기 힘든 일을 하는 이유는 의외로 애국심이나 대의명분이 아니다. 극 중 차경의 대사를 통해서도 나오지만, 사랑하는 사람의 신념을 지켜주기 위해 유령이 되길 자처했다.
이하늬는 그런 차경의 시작에는 지나치지 못하는 마음이 있었을 거라 짐작했다. 재력가의 딸로서 엘리트 코스를 밟아왔을 차경이 굳이 모진 삶을 선택한 데에는 사회적인 책무감도 있었겠지만, 연인이었을 수도 친구였을 수도 있는 사랑하는 사람의 신념이 시발점이 됐다고 봤다.
차경의 삶을 뒤따르며 생각과 고민을 거듭하면서도, 막상 차경이 됐을 때는 자신이 어쩌지 못하는 감정들이 있었음을 깨달았다. 그렇기에 어떤 장면에서는 눈물을 흘려서는 안 됨에도 자신도 모르게 대사를 하며 눈물을 쏟기도 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눈물이 날 대사도 아니었거니와 자신의 목소리마저 담담했다. 그러나 촬영 시작과 함께 대사를 내뱉는 순간, 속절없이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차경을 연기하며 느낀 또 다른 생소한 감정과 현상 중 하나는 바로 '비장이 끊긴다'고 표현할 정도의 슬픔을 경험했다는 점이다. 연기에 앞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라 생각한 난영(이솜)이, 차경의 삶에 가장 의미 있고 차경이 죽더라고 살았으면 했던 존재의 죽음을 목도한 순간 차경을 연기한 이하늬는 생전 처음 마주한 슬픔의 깊이를 온몸으로 받아들였다.
"전 정말 난영을 들고 뛰거나 목 놓아 울었을 거예요. 나중에는 너무 참아서 울음을 안으로 삼켜내다 보니 비장이 끊긴다는 말하잖아요. 여기가 끊기는 느낌이 들어서 다음날 걷지 못했어요. 감정 신을 연기하면서 그런 적은 처음이었어요. 뭔가가 툭 끊기는 느낌이 들어서 '뭐지?' 하면서 연기했죠. 어기적거릴 정도로 며칠 동안 아팠는데, 이게 너무 슬프면, 이렇게 울면 몸이 이렇게도 되는구나, 그래서 비장이 끊기는 슬픔이라고 하는구나, 그때 느꼈어요."
압축적으로 쌓아 올린 차경의 감정을 관객도 마주하길 바라며
이처럼 그렇게 온 마음으로, 온몸으로 박차경을 연기했다. 박차경이 가진 감정과 고민을 액션이나 동작 하나하나에도 담아냈다. 대사로 표현하는 캐릭터가 아닌 만큼, 시퀀스 하나하나 연기할 때마다 압축적이어야 했다.
대표적인 장면이 무라야마 쥰지(설경구)와의 일대일 액션 신이다. 이하늬가 보기에는 단순히 승패를 결정짓는 맞대결이 아닌, 액션으로 표현되는 완벽한 감정 신이었다.
그는 "정말 죽음이라는 것을 두고, 죽으려고 사는 사람과 살려고 하는 사람이 맞붙는 대결 구도라고 생각했다"며 "쥰지는 살려고 하는 사람이기에 죽지 않기 위해 계속 자신을 방어하지만, 차경을 죽으려고 덤벼든다. 굉장히 무모할 수 있음을 알면서도 하는 것이고, 그런 게 바로 차경"이라고 설명했다.
"우리나라 창작자들은 콘텐츠도 될 때까지 하잖아요. K-콘텐츠가 세계에서 인정받는 건 그런 끈질김이 있기에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끊임없이 물고 늘어지며 디테일을 놓치지 않고 싶어 하는, 조금이라도 더 낫게 만들려고 하는 끈질김이요. 관객들이 그런 게 차경 안에도 꾹꾹 담겨 있음을 볼 수 있는, 그런 캐릭터로 대변되면 좋겠어요."(웃음)
<하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