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7) 참가국들이 '손실과 피해(loss and damage)' 대응을 위한 기금 조성에 가까스로 합의했다. 일각에선 기금 조성 방안과 범위‧규모 등 구체적인 논의가 없다는 점에서 성명 채택의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21일 환경부와 외신 등에 따르면 지난 6일(현지시각) 이집트 샤름 엘 셰이크에서 열린 COP27은 당초 폐막일인 18일을 이틀 넘긴 20일에야 막을 내렸다. 이번 회의에서 처음으로 정식 의제로 채택된 '손실과 피해' 대응 문제를 두고 선진국과 개발도상국 사이에 진통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당사국들은 지구 온난화 등 기후 변화로 인해 피해를 입은 개도국들을 지원하기 위한 기금 조성에 극적으로 합의했다. 최종 합의문인 '샤름 엘 셰이크 이행계획(Sharm El-Sheikh Implementation Plan)'은 "기후변화의 악영향은 주민의 비자발적 이주, 문화재 파괴 등 경제적, 비경제적 손실을 유발하면서 손실과 피해에 대한 충분하고 효과적인 대응의 중요성을 분명하게 보여줬다"고 명시했다.
'손실과 피해' 문제는 개도국들이 기후 변화로 인한 경제적‧비경제적 피해 관련 보상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면서 본격 도마에 올랐다. 그러나 지난 2010년 멕시코 칸쿤 총회(COP16)에서 선진국들은 개도국들의 온실가스 감축과 기후변화 적응을 위해 2020년까지 매년 1000억 달러를 지원하겠다고 했지만, 실제 이행률은 80%에 미치지 못하면서 이번 회의에 관심이 쏠렸다.
글로벌 에너지 위기 상황 속에서 기금 조성 합의를 이끌어 낸 것을 두고 외신들 사이에선 '2015년 파리 협정' 이후 가장 중요한 성과라는 호평이 나온다. 기금 조성을 위한 구체적인 방안과 기후변화로 인한 피해 시점 및 범위 설정 등이 명확하게 논의되지 않은 탓에 실질적인 이행까지는 한계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일단 지구 온난화 등 기후변화로 인한 피해를 금전적으로 산출하는 문제부터 논란이 되고 있다. 지난 6월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기후변화 취약 55개국은 지난 20년 동안 기후변화 관련 손실을 약 5250억 달러(약 740조 원)로 추산했다. 이는 이들 국가의 전체 GDP(국내총생산)의 약 20%에 달하는 수치다.
보상금의 성격을 두고도 선진국과 개도국 간 이견이 좁혀지지 않고 있다. '손실과 피해' 보상은 산업혁명 이후 약 100년 동안 화석연료를 활용해온 선진국들이 개도국들의 기후 적응을 돕기 위해 지원한 기금과는 성격이 다르다는 지적이다. 이 때문에 개도국들은 별도 보상을 위한 기금‧기구 설립 필요성을 제기했지만, 선진국들은 기존 기후변화 문제 등을 포괄적으로 논의하자는 입장이다.
'손실과 피해' 기금을 조성하는 과정에서 선진국들 간 분담 문제도 관건이다. 원론적으론 온실가스 배출의 주범인 '선진국들'이 보상금을 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지만, 미국과 유럽연합(EU) 등은 '무한 책임'을 우려해 이를 외면해왔다. 이번 총회에선 독일과 벨기에 등이 '손실과 피해' 보상을 위해 소액이라도 부담하겠다는 입장을 밝히면서 본격적인 논의가 이어졌다. 구체적인 재정 분담 문제는 향후 1년 안에 가동될 별도 위원회에서 다뤄질 것으로 보인다.
이같은 성과에도 불구하고 추가적인 '화석연료 감축' 제안은 공감대를 얻는 데 실패했다. 지구 온도의 상승 폭 1.5도 이내로 제한하는 목표 달성을 위해 석탄 발전뿐만 아니라 석유·천연가스 등 모든 종류의 화석연료 사용을 감축하자는 주장이 제기됐지만, 동의를 얻지 못한 것이다.
선진국 및 군소도서국 협상그룹(AOSIS) 등은 오는 2025년 이전까지 전 세계 배출량 정점 달성 촉구와 글래스고 기후합의의 석탄발전 단계적 축소, 화석연료 보조금 단계적 철폐보다 진전된 감축 노력 등을 요구했지만 최종적으로 반영되지 못했다. 다만 '정의로운 전환' 프로그램'을 설립하기로 하고, 내년 제28차 총회부터 해마다 '정의로운 전환에 관한 고위 장관급 라운드테이블'을 열기로 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사태로 촉발된 글로벌 에너지 위기가 장기화되면서 '탄소중립' 정책을 이끌고 있는 서방 선진국들을 중심으로 화석연료 사용에 관대한 입장으로 선회 움직임이 감지된다. 지난해 COP26에서 상당수 당사국들은 석탄 발전을 단계적으로 감축하겠다고 밝혔지만 지난 1년 간 화석연료 사용량은 오히려 1% 가량 증가했다. 이번 COP27 총회에서도 탄소 배출 주범국인 미국과 중국 등이 정작 화석연료 감축에 대해선 뚜렷한 입장을 보이지 않았다.
이 때문에 러시아 사태가 진정되기 전까진 기후변화 관련 논의는 내년 아랍에미리트(UAE) 두바이에서 열리는 제28차 총회로 넘어갈 수밖에 없다는 전망에 무게가 실린다. 중앙대 정동욱 에너지시스템공학부 교수는 이날 CBS노컷뉴스와 통화에서 "지구 온난화를 막기 위해선 탄소 감축에 동참해야 한다는 명분과 그 과정에서 우리 경제의 타격을 최소화해야 한다는 실리 사이에서 현명한 조율이 필요하다"며 "일단 러시아 사태 해결이 관건일 것"이라고 했다. 에너지 업계 관계자도 "지금은 에너지 안보 차원에서 자국 이기주의가 득세하는 분위기라 내년 총회에 기대를 걸어야 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