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용산 핼러윈 데이에서 마약이 다시 문제가 되면 안 된다는 깊은 인식을 하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김광호 서울경찰청장, 지난 7일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현안질의)
핼러윈 참사 직전까지 경찰 수뇌부의 관심이 '대규모 집회 통제'와 '마약 단속'에 쏠려 있었다는 점을 보여주는 사실 관계가 속속 드러나고 있다. 이임재 전 용산경찰서장은 지난달 29일 대통령실 앞에서 집회를 챙긴 뒤 밤 9시20분쯤 경찰서 근처 설렁탕 집에서 식사를 했다. 참사 발생을 경고하는 '압사 위험' 신고가 빗발치던 바로 그 시각이다.
이태원 일대에는 경찰 130여명이 있었다. 이 중 상당수가 '마약 단속'을 위해 투입된 사복 경찰이었다. 애초 용산서 소속 경찰 15명이 단속에 투입될 계획이었지만 참사 전날 김광호 서울경찰청장의 지시로 서울청 마약수사대 2개 팀이 추가로 배치됐다. 사실상 10만 명이 몰리는 인파 사고 위험에 대비한 현장 경력은 이태원 파출소 경찰 30여명이 전부였다.
이런 경찰 지휘부의 '실책'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그간 이어온 윤석열 정부의 정책 기조를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특히 전문가들은 참사를 앞두고 '마약과의 전쟁'을 강조하는 대통령과 국무총리, 여당의 목소리가 거듭 반복된 점에 주목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현장 경찰 137명, 마약 단속에 50여명…질서 유지에 투입 못 해
8일 경찰이 더불어민주당 이태원 참사 대책본부에 제출한 자료를 보면, 지난달 2일 사고 현장 인근에는 형사·강력 등 경찰 52명이 배치돼 있었다. 서울청 마약수사대와 서울 용산·동작·강북·광진서 소속 형사들은 오후 8시48분부터 참사 장소에서 가까운 이태원파출소 인근이나 세계음식문화거리 등에 투입됐다.
이들이 참사 전 질서 유지를 위해 한 일은 오후 9시33분 1개 팀(5명)이 파출소 안에 있던 형사과장 지시를 받아 이태원역 출구 쪽의 인파 분산을 유도한 것이 유일하다. 나머지 9개 팀은 참사 발생 30분이 지난 오후 10시48분에야 사고 수습에 투입돼 심폐소생술(CPR) 등 구조 활동을 진행했다. 당시 용산서 지휘부의 오판이고 늑장 대응이었다.
지휘부는 왜…대통령, 총리, 당정 거듭 '마약 전쟁' 강조
수뇌부의 관심이 이처럼 마약 단속에 집중된 것은 핼러윈 일주일 전부터 시작된 정부 기조와 무관하지 않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달 21일 경찰의 날 행사에서 "마약과의 전쟁에서 승리해 달라"고 말했다. 사흘 뒤 한덕수 국무총리와의 주례 회동에서도 "마약과의 전쟁이 절실하다. 특단의 대책이 필요하다"고 재차 강조했다. 다시 이틀 뒤인 10월 26일 국민의힘과 정부는 '마약류 관리 종합대책' 관련 당정협의회를 열고, 검찰과 경찰을 중심으로 특별수사팀을 꾸리겠다고 밝혔다.
이렇듯 대통령과 총리는 물론 참사 사흘 전 당정까지 '마약과의 전쟁'에 보조를 맞추면서 경찰 지휘부의 관심이 마약 단속에 집중될 수밖에 없는 분위기가 조성된 셈이다. 김광호 서울청장은 당정협의 이틀 뒤 10월 28일 특별 지시를 통해 이태원 일대 핼러윈 마약 단속 경찰 인력을 기존(15명)보다 3배 이상 늘리며 정부 기조에 화답하는 모양새를 취했다. 김 청장은 지난 7일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현안질의에서 '대통령실까지 마약과의 전쟁을 선포해 다른 업무를 제쳐두고 마약 단속에 집중한 것 아니냐'는 질문에 "마약 관련 형사들을 투입한 것은 제 지시가 맞는다"라면서 "지난 7월부터 마약을 특별 단속했고 국회에서도 특별 대책을 수립하라고 했었다. (이번) 핼러윈 데이에서 마약이 문제가 되면 안 된다는 깊은 인식이 있던 것이 사실이다"라고 했다.
참사 전까지 집회 통제 용산서장, 서울청장도 집회 마치자 퇴근
마약 단속과 함께 경찰 수뇌부가 신경을 집중한 부분은 바로 집회 관리다. 참사 당일 경찰은 광화문 일대와 용산 대통령실 인근 등 서울 시내에서 열린 대규모 집회 통제에 기동대 5천명을 투입했다. 삼각지역 인근에서 보수·진보 성향 단체의 집회 동선이 겹쳐 양측의 충돌할 위험이 커지자 이임재 전 용산서장은 현장을 끝까지 지키며 직접 통제했다. 김광호 서울경찰청장도 휴일에 출근한 뒤 집회가 충돌 없이 마무리된 것을 보고 받은 뒤 오후 8시 36분 청사를 떠나 집으로 향했다.압사 사고 위험이 있다는 112신고가 오후 6시34분부터 접수됐지만, 사고 발생 전까지 김 서울청장이나 상황관리관에게 보고되지 않았다. 김 서울청장은 112상황실장으로부터 '핼러윈 데이 치안여건 분석 및 대응방안 보고'를 받고도 별도 질서 유지 관련 지시를 하지 않았다. 이 전 서장은 이태원 일대에 인파가 몰려 안전사고가 우려된다는 내용의 용산서 정보과 보고서를 참사 수일 전 받고도 무시했다. 심지어 용산서 정보과장과 정보계장은 해당 보고서를 참사 후 삭제했다는 의혹까지 받는다.
전문가들은 이런 경찰 수뇌부의 판단이 정부 정책 기조와 구분지어질 수 없다고 짚었다. 4·16 세월호 참사 특별조사위원회에서 활동했던 오지원 변호사는 "현장에 배치된 경찰 130여명이 당시 상황을 정확히 공유·보고 했는지가 첫번째(로 중요하다)"라며 "만일 '마약 단속'을 중요하게 다루는 분위기를 일선에서 인지하고 있었다면, 아무리 현장에서 신고가 들어오더라도 우선적으로 단속 업무를 중시할 수밖에 없다. (마약 단속) 인력을 인파 분산 등에 유연하게 돌리는 지시를 하기도 어려웠을 수 있다"고 말했다. 결국 당시 현장의 한정된 인적 자원을 어떻게 배분하느냐가 정부 정책이나 고위층 의사와 무관하지 않다는 얘기다.
한편 국가애도기간이 지난 5일 끝나면서 경찰의 자체 감찰·수사도 속도를 내고 있다. 경찰청 특별수사본부(특수본)는 참사 당시 서울경찰청 상황실 당직자(류미진 전 서울청 인사교육과장)와 이임재 전 용산경찰서장, 박희영 용산구청장, 최성범 용산소방서장, 용산경찰서 정보과장 및 계장 등 6명을 입건하고 조속히 소환해 조사하겠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