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원 압사 참사' 이후 심폐소생술(CPR)에 대한 관심이 뜨거워지고 있다. 서울 한복판에서 재난상황이 벌어졌을 때 다수의 시민이 자발적 CPR에 나선 사례가 알려지면서, 언제 어디에서 응급처치가 필요한 일이 생길지 모른다는 경각심이 높아진 것이다. 대한심폐소생협회에 따르면, 4분 남짓한 '골든 타임' 내 CPR을 효과적으로 실시할 경우 생존 확률을 3배 이상 높일 수 있다.
이처럼 '최소한 CPR은 배워두자'는 수요가 늘면서, 참사 직후 대한적십자사 등에는 교육 관련 문의가 배로 급증한 것으로 파악됐다. CPR은 의료진이 아닌 일반 시민도 충분히 습득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비용 대비 효과가 높은 교육이라 할 수 있다. 정부 차원에서 교육과정 개설을 더 지원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하지만 정작 정부는 내년도 CPR 교육 관련예산을 삭감한 것으로 드러났다.
6일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소속 더불어민주당 한정애 의원실이 보건복지부로부터 제출받은 내년도 예산안 자료를 보면, 복지부는 2023년도 '응급처치 활성화 지원' 사업예산을 올해 39억 5천만 원에서 1억 5천만 원 깎인 38억 원으로 편성했다. 조정 과정에서 감축이 이뤄진 것이 아니라, 복지부가 처음부터 3.7%를 삭감한 안(案)을 요청한 것으로 확인됐다.
해당 사업은 구체적으로 △심폐소생술 등 응급처치 교육비 지원 △응급의료정책 홍보 △아동응급처치 교육 △자동심장충격기(AED) 보급 지원 등의 명목으로 분류된다. 이 중 정부는 CPR 교육이 포함된 첫 번째 항목을 '콕' 집어 예산을 줄인 것으로 나타났다.
올해 CPR 등 응급처치 교육지원으로 편성된 예산은 18억이었다. 교육대상 72만 명에 1인당 비용인 5천 원, 지자체 보조비율(50%)을 곱해 산출된 금액이다. 복지부는 내년도 교육인원을 금년보다 6만 명 적은 66만 명으로 상정해 이 예산을 16억 5천만 원으로 낮췄다. 단일 항목으로 보면 8.3%나 깎인 수치다.
찾아가는 아동안전교육 등을 지원하는 아동 응급처치교육(3억 6천), AED 보급 지원(8억 7500만)에 대해선 올해 수준을 거의 그대로 유지한 것과 대조적이다. CPR 및 응급실 이용문화 개선 등 응급의료정책을 홍보하기 위한 사업비 역시 이번 해와 동일한 9억 원이 편성됐다.
물론 코로나19 사태 이후 CPR 교육 자체가 급격히 줄어든 것은 사실이다. 복지부에 따르면, 지난 2019년에는 1년간 약 67만 명이 교육을 받았지만 코로나19 유행이 시작된 2020년에는 교육인원이 약 15만 명, 작년도 약 18만 명에 그쳤다. 감염병 전파 우려로 대면 교육이 위축된 탓이다.
다만, 목격자에 의한 CPR 실시율을 올해 목표(25.6%)보다 높은 26.0%로 올려 잡으면서 관련예산을 예년 정도로 유지조차 하지 않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다.
더군다나 정부가 제시한 사업 목적은 "일반인의 CPR 실시율이 2020년 기준 26.4%에 불과한 현 응급처치 수준을 선진국 수준으로 향상시키기 위해 교육·홍보 등을 강화"하는 것이다. 실제로 이 비율은 미국(33.3%)이나 일본(34.8%) 등 주요 선진국에 비해 상당히 낮은 편이다.
여기에 고령화의 가속화, 인스턴트·간편식 등을 즐겨먹는 식습관의 변화로 심정지 발생규모는 매년 느는 추세다. 국내 심정지 발생 건수는 지난 2018년 3만 539건→2019년 3만 782건→2020년 3만 1652건 등 계속 오르고 있다.
국가 재난의료체계 운영에 쓰이는 예산도 일부 삭감됐다. 총 예산은 56억 4700만 원에서 59억 8700만 원으로 6.0% 증액됐으나, △재난의료지원 교육 △재난응급의료 무선통신망 운영비가 눈에 띄게 줄었다.
'재난의료지원 교육'은 재난대응능력을 제고하기 위해 41개 재난거점병원·중앙응급의료센터에 소속된 재난의료지원팀, 일명 '디맷'(DMAT·Disaster Medical Assistance Team)을 대상으로 실시하는 교육이다. 복지부 산하의 국립중앙의료원에 위탁해 실시한다.
정부는 내년도 이 부문 예산을 올해 3억 5천에서 8.6% 깎은 3억 2천만 원으로 편성했다. 교육진행경비를 1억 8300만 원→1억 6600만 원, 비품·소모품비를 3천만 원→2천만 원 등으로 각각 줄인 결과다.
디맷은 지난달 29일 밤, 이태원이 아비규환이 됐을 당시 구조에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맡은 의료지원팀이다. 의사·간호사·응급구조사 등으로 구성된 이 팀은 재난 현장에서 환자의 중증도를 분류하고 응급처치 및 이송을 수행한다. 복지부는 참사 수습을 위해 15개의 디맷을 투입하고, 중앙응급의료상황실을 통해 이송병원 선정 등을 지원한 바 있다.
전국 단일 재난안전통신망 참여를 통해 소방·지자체·의료기관의 공동대응을 돕는 예산도 줄었다.
정부는 각 시·도 재난의료 담당부서, 재난거점병원, 보건소 등에 지원하는 '재난의료무선통신망 운영' 관련예산을 올해 8억 8500만에서 무려 45.9% 삭감한 4억 7900만 원으로 배정했다. 회선이용료와 단말기 구입비용이 크게 축소된 것으로 파악됐다.
한정애 의원은 "정부가 코로나 시기에 집행율이 낮다는 이유로 CPR 교육 예산을 감축했는데, 매우 부적절하다"며 "재난은 언제 어디서 터질지 몰라 평소에 준비해야 하는데, 응급의료에 대한 정부의 마인드가 너무 안일하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