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인 父의 기막힌 사연…외동딸 잃고도 "고맙습니다"

3일 '이태원 참사' 희생자 고려인 추도식
러·우크라 침공에 막힌 하늘길과 막대한 운구비용 마련에 '진땀'
"이곳에 온 게 자랑스럽다" 모국 한국을 사랑한 외동딸
우여곡절 끝에 딸 시신 송환…"미안하고 사랑했다" 눈물

3일 인천시 연수구 인천시 연수구 연수동 함박종합사회복지관에서 열린 '이태원 참사 희생자' 러시아 국적 고려인 박율리아나(25)씨의 추도식에서 박씨의 아버지 아르트루(64)씨가 조문객들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는 모습. 주영민 기자

"국민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장례를 치를 수 없었을 겁니다. 저희 가족에게 손을 건네 준 모든 분들에게 감사합니다."
 
3일 오후 5시 인천시 연수구 연수동 함박종합사회복지관에서 열린 '이태원 참사 희생자' 러시아 국적 고려인 박율리아나(25)씨의 추도식에서 박씨의 아버지 아르트루(64)씨가 조문객들에게 건넨 말이다.
 
아버지 박씨가 조문객들에게 이런 말을 한 건 딸의 시신을 고향으로 보내기 위해 너무나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기 때문이다.
 

러·우크라 침공에 막힌 하늘길과 막대한 운구비용 마련에 '진땀'


너머인천 고려인문화원 등에 따르면 지난달 29일 이태원 참사로 숨진 박씨의 시신은 4일 오후 5시쯤 동해항국제여객터미널에서 블라디보스토크행 국제여객선을 통해 어머니가 있는 나훗카로 운구될 예정이다.
 
경기 의정부 병원에 안치된 박씨 시신은 애초 유족들의 의견에 따라 러시아로 송환하기로 했지만 시신 운구비용으로만 1200만원 상당의 지출이 예상돼 지원이 절실했다. 우리 정부가 외국인 희생자에게도 장례비용 1500만원을 지원하겠다고 발표했지만 장례 절차가 모두 마무리된 이후 지급될 예정이어서 유족 입장에서는 당장 송환 비용을 마련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게다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여파로 한국과 러시아를 잇는 직항 항공편도 끊겨 시신 운구 일정은 차일피일 미뤄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소식을 접한 너머인천 고려인문화원과 주한러시아대사관은 숨진 박씨에 대한 예우를 다한다는 차원에서 시신이 본국으로 송환할 방법을 찾기 위해 백방으로 뛰었다.
 
문화원은 수소문 끝에 러시아로 향하는 직항 배편을 확인했고, 주한 러시아대사관은 장례대행업체를 지정해 시신 운구 절차를 의뢰했다. 그러나 대행업체가 다시 한 번 박씨의 송환에 발목을 잡았다. 업체가 요구한 전체 비용은 1200만원인데 이 가운데 1000만원의 선지급을 요구했다.
 
우리 정부는 장례를 마친 뒤 지원금을 지급하기로 한 상황에서 아버지 박씨 혼자서 1000만원을 마련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더구나 러시아로 향하는 직항 배편은 일주일에 단 한 차례만 운항했다. 선지급금 마련이 늦어질수록 1주일 단위로 송환도 늦어지게 된 셈이다.
 
박씨 부녀의 딱한 사정이 러시아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시민들과 여러 단체로 퍼지면서 후원금 모금도 이뤄졌지만 전날까지 모인 돈은 100만원 남짓이었다. 다행히 출항 이틀 전 러시아대사관이 운구비용 1200만원 가운데 미납액 750만원을 유족에게 빌려주는 방식으로 지원하기로 하면서 가까스로 출항에 맞춰 딸의 시신을 운구할 수 있게 됐다.
 
3일 러시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 주재 한국총영사관 앞에 이태원 참사 희생자를 추모하기 위한 흰 국화꽃이 놓여있다. 연합뉴스

"이곳에 온 게 자랑스럽다" 모국 한국을 사랑한 외동딸


사회 초년생이었던 박씨는 지난달 직장 동료와 함께 이태원 핼러윈 축제를 찾았다가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 동료와 저녁식사를 마치고 식당을 나서던 차에 인파에 휩쓸렸고 끝내 목숨을 잃었다. 그와 함께 있던 동료는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지만 아직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
 
그는 한국에 먼저 정착한 아버지를 따라 1년 6개월 전쯤 국내로 입국해 인천 연수구 함박마을에 자리를 잡았고, 올해 초부터 유치원 강사로 취업해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쳤다.
 
박씨의 유치원 동료들은 이날 추도사를 통해 "여행을 좋아하고, 새로운 것을 배우고 싶어했던 열정적인 동료였다"며 "일부러 외국인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며 영어를 연습해 아이들을 가르치려고 힘썼다"고 말했다.
 
또 다른 이웃도 그에 대해 "사랑스러운 딸이자 친절한 선생님, 이웃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친구였다"고 회상했다.
 
A씨는 평소 모국인 한국을 사랑했다. 지난 7월 자신의 SNS(사회관계망서비스)에 "1년 전 한국어도,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도 모른 채 한국으로 왔다. 그냥 여기서 살고 싶었다. 이런 결정은 위험하고 즉흥적이었다. 지금 나는 내가 자랑스럽다…"는 글을 남기기도 했다.
 
그의 SNS에는 서울 시내 식당과 전시회, 아름다운 거리를 찍은 사진들로 가득하다. 그러면서도 최근 러시아 현지 상황에 대해 염려했고 어머니가 홀로 남겨진 것을 걱정했다고 지인들은 전했다.
 
지난 2일 오후 서울 용산구 이태원역 1번 출구 앞 핼러윈데이 사고 희생자 추모공간을 찾은 외국인이 지인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 연합뉴스

우여곡절 끝에 딸 시신 송환…"미안하고 사랑했다" 눈물


외동 딸의 죽음 앞에 슬퍼할 겨를도 없이 장례를 치러는 데 온 힘을 쏟은 아버지 박씨는 이날 딸의 친구와 동료, 이웃들이 마련한 추모공간에서 끝내 참았던 눈물을 떨구며 딸에게 마지막 말을 어렵사리 전했다. 박씨는 "하나 밖에 없는 딸에게 너무 미안하다. 사랑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사고 다음날 딸에게 수없이 전화했지만 받지 않았고, 낮 12시쯤 경찰이 휴대전화를 습득했다는 연락을 받았을 때도 딸이 휴대전화를 잃어 버렸을 뿐 살아 있을 거라고 믿었다"며 "나중에 병원에 딸의 시신을 안치했다는 소식을 듣고도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고 말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아버지 박씨는 장례비용을 마련해 더 이상 후원금을 받지 않겠다고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을 전하고 싶다며 돈을 건넨 국민들에게도 감사의 말을 전했다. 그는 "계좌에 1000원부터 50만원까지의 돈이 들어왔다"며 "금액이 많고 적음이 중요하지 않았다. 다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위로와 추모, 격려의 마음을 전해준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마음의 빚을 졌다"고 말했다.
 
숨진 박씨의 시신 송환을 도왔던 너머인천고려인문화원 손정진 대표도 "후원금은 러시아 현지 장례 절차나 유족 위로금 등으로 활용될 것"며 "사회적 참사에 시민분들께서 분노와 무기력감을 느끼는 와중에도 따뜻한 관심과 사랑을 보내줘 그의 마지막 길은 쓸쓸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실시간 랭킹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