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면당한 11번의 SOS…장소·원인·결과 '모두 적중'

박종민 기자

"해밀톤 호텔, 일방통행, 대형사고, 압사"

이태원 참사가 일어나기 전 경찰에 접수된 112 신고에는 실제 벌어진 비극의 장소와 원인, 결과 모두 정확히 예견돼 있었다. 참사 당일인 10월 29일 오후 6시34분부터 10시 11분 사이 이태원 참사 관련 112 신고는 모두 11건이다. 경찰은 이 중 4건에 대해서만 현장에 출동했고, 이마저도 별다른 조처를 하지 않은 채 종결했다. 경찰은 이렇듯 시민들의 절박한 도움 요청과 경고가 수차례 있었는데도 156명의 압사를 막지 못한 책임을 피하기 어려울 전망이다.

경찰청은 1일 참사 당일 긴급신고 112에 접수된 신고 11건의 녹취록 전문을 공개했다. 첫번째 신고는 참사 발생 4시간여 전인 오후 6시34분이었다.


첫 신고부터 '압사'를 언급했다. 신고자는 "해밀톤 호텔 골목에 사람들이 오르고 내려오는데 너무 불안하다"며 "사람이 내려올 수 없는데 계속 밀려 올라와 압사당할 것 같다"고 상황의 심각성을 전했다. 그는 "이태원 메인스트리트(세계음식거리)에서 나오는 인구와 이태원역 1번 출구 사람들이 그 골목으로 다 들어간다. 아무도 통제 안하는데 경찰이 좀 통제해서 (안에 있는) 인구를 뺀 다음에 안으로 들어오게 해달라"고 말했다. 당시 상황의 심각성과 경찰의 개입 필요성을 구체적이고 명확히 짚었다.

실제로 이날 참사는 많은 인원이 순식간에 해밀턴 호텔 옆 좁은 내리막길로 내몰리면서 발생했다. 이태원역을 빠져나와 대로변에서 세계음식거리로 진입하려는 사람과 반대로 빠져나가는 사람, 인파로 북적이는 가게에서 나오거나 골목에 머무르면서 축제를 즐기던 사람 등 세 갈래로 만나 뒤엉킨 것이다. 첫 112 신고에서 언급한 위험 장소, 인파의 흐름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류영주 기자

다른 신고에도 참사가 일어난 골목길이 여러번 언급된다. 오후 8시 33분 3차 신고자는 "와이키키 매장 앞 삼거리에 인파가 너무 많이 몰렸다. 사람들이 길바닥에 쓰러지고 사고가 날 것 같다"고 했다. 직접 찍은 영상물까지 112에 전송했지만, 신고를 접수한 경찰은 현장에 나가지 않고 종결 처리했다.

경고음은 계속해서 울렸다. 오후 9시 전후로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갔던 것으로 보인다. 신고는 8시 53분, 9시, 9시 2분, 9시 7분, 9시 10분 등 단 몇 분 단위로 연달아 접수됐다. 8시 53분(4차) 신고자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압사당할 것 같고 아수라장이다"라고 했다. 그 다음 5차 신고 때는 "대형 사고 나기 일보 직전이다. 지금 바로 오셔야 한다"는 다급한 목소리가 담겼다. 불과 7분 뒤 6차 신고에는 "압사당할 위기다. 원웨이(one-way), 일방통행할 수 있게 통제좀 부탁드린다"고 보행 방향을 일방통행으로 해달라는 요구까지 있었다.

아무런 조치가 없자 오후 9시51분 신고자는 "가능하면 빨리 나와달라", "지금 되게 위험한 상황이다", "빨리 좀 와달라" 등 연신 '빨리'를 외치며 경찰의 도움을 요청했다. 참사 직전인 오후 10시 11분 신고 녹취록에는 일촉즉발의 상황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신고자는 "압사될 것 같다"며 입을 연 뒤에는 경찰관과 제대로된 대화를 이어가지 못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러나 경찰은 11건 중 4건만 출동했다. 실제 참사의 장소와 원인, 결과를 지목한 첫 신고는 '불편 신고' 정도로 여겼다고 한다. 시민들의 다급한 신고가 빗발쳤지만 경찰의 부실한 대응이 참사와 무관하지 않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경찰을 관할하는 상급 부처인 행정안전부와 대통령실 등 정부 전반이 이번 사태의 책임을 피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경찰 관계자는 이날 브리핑에서 "참사 발생 한시간 전 오후 9시에서야 전조 증상이 보였다"며 그보다 앞선 신고의 심각성을 부인하는 취지로 발언했다.

경찰은 신고를 접수한 뒤 왜 미출동 등 제대로 대응하지 않았는지, 출동한 것으로 기록된 4건의 경우 실제 어떠한 조치가 이뤄졌는지, 신고 내용이 어디까지 보고됐는지 등을 감찰할 방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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