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현지시각 8일 오후 서거했다. 향년 96세다. 여왕은 1952년 재위에 오른 뒤 70년 동안 전후 영국 현대사의 상징이었다. 여왕이 맞은 영국 총리는 윈스턴 처칠부터 리즈 트러스까지 모두 15명에 이른다.
기라성 같은 영국 총리들과도 정치적·개인적 차이점을 극복하며 정치적으로 원만한 관계를 이어갔던 여왕이지만, 그가 끝내 거리를 좁힐 수 없었던 사람은 며느리 다이애나비(Princess Diana)였다.
영국 여왕과 국민의 여왕
다이애나비 서거 전후로 영국 왕실이 존폐의 기로에 놓였다는 평가가 나왔을 정도로 여왕과 며느리의 관계는 일반적인 고부(姑婦) 갈등으로는 설명하기 어렵다.여왕은 다이애나비와 그가 대표하는 '현대의 영국인'이 가까이 다가서기 어려운 존재였다. 2차 대전의 참상을 직접 겪은 여왕과 전후 세대인 다이애나비 사이 세대 차이는 비단 '윈저 가문'만의 일은 아니었다.
두 사람은 '왕실의 의무'에 있어서도 다른 관점을 견지했다. 여왕은 2차 대전에 영국 육군으로 참전했을 만큼 희생정신이 강했지만, 본인의 대관식은 BBC 생중계를 거부했을 정도로 보수적인 성향을 숨기지 못했다. 왕실 최초로 자녀의 학교 행사에 참석해 직접 달리기를 하는 등 대중적인 모습을 자주 노출했던 다이애나비와 비교될 수밖에 없었다.
다이애나비가 런던의 한 병원에서 에이즈 환자와 만나 악수를 하거나 지뢰폭발로 다리를 잃은 소녀를 무릎에 앉히는 등 '민중의 왕세자비'로 거듭나는 동안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는 어색해져만 갔다. 다이애나비가 국민과 가까워질수록 여왕으로부터는 멀어졌고, 다이애나비의 전세계적인 인기는 여왕에게 부담으로 작용했다.
자기 표현에 익숙하지 않은 여왕과 그렇지 않은 며느리 간 갈등은 찰스 왕세자의 외도가 알려지면서 정점을 찍게 된다. 다이애나비는 여왕이 아들의 외도를 바로잡아 주기를 바랐지만, 가정사적인 측면에서 여왕은 만점짜리 어머니와는 다소 거리가 있었다. 다이애나비가 여왕을 알현하기 위해 기다리는 자리에서 30분 넘게 눈물을 쏟고, 여왕 앞에서는 한시간 내내 울음을 그치지 않아 여왕이 곤혹스러워 했다는 일화는 잘 알려져 있다.
여왕 역시 남편인 필립공의 외도로 속을 썩였던 적이 잦았던 터라, 다이애나비 입장에서는 시어머니가 자신의 편을 들어주지 않는 것에 대한 서운함이 더 컸을 것이라는 말도 나왔다. 반면 여왕은 결혼생활의 어려움을 왕실에 티 내는 어린 며느리가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세간에는 입덧이 심했던 다이애나비가 고충을 토로했는데, 입덧이 하나도 없었던 여왕이 이에 공감해주지 못하면서 두 사람의 심리적 거리감은 더욱 커졌다는 소문도 떠돌 정도였다.
며느리 앞에 고개 숙인 여왕…런던올림픽에서 '본드걸'로 깜짝 등장
아이러니하게도 영국 왕실의 입지는 다이애나비의 장례식을 거치면서 조금씩 탄탄해진다.1997년 다이애나비가 프랑스 파리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했을 당시, 여왕은 가족들과 스코틀랜드 발모럴성에서 휴가를 보내던 중이었다. (※여왕은 이 성에서 숨을 거뒀다)
여왕은 다이애나비의 사망 소식이 전해진 뒤 곧장 런던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런 데다 찰스 왕세자와 이혼한 다이애나비는 더이상 왕실의 일원이 아니라는 이유에서 왕실은 5일 동안 조기를 걸지 않는 등 비인간적인 모습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심지어 다이애나비가 살던 켄싱턴 궁전도 대중의 접근을 차단시켜 시민들은 그 근처에 모여 애도해야 하는 상황이 펼쳐지면서 여왕과 왕실을 향한 영국인의 분노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당시 영국 조간 1면에는 "여왕은 어디에(Where is our Queen?)", "당신의 백성들이 슬퍼하고 있습니다, 뭐라고 말 좀 하세요 폐하(Your people are suffering — speak to us, Ma'am)"와 같은 문구들로 도배됐다.
여왕의 치세 중 왕실과 영국인의 관계가 최악으로 치달았던 때 역시 이때였다. 영미 언론도 늘 여론에 기민하게 대응했던 여왕이 정무적 감각을 완전히 잃은 것처럼 보였던 거의 유일한 때로 기억한다.
침묵하던 여왕은 다이애나비 장례식 전날 성명을 가까스로 성명을 발표했다. 여왕은 "우리는 영국과 전세계에서 다이애나의 죽음에 대한 슬픔을 목도했다. 여왕으로서, 할머니로서 다이애나에게 애도를 표한다"고 말했다. 통상 성명에서 쓰던 "왕실은"이라는 주어 대신 "우리는"이라고 하면서 여왕이 인간적인 면모를 조금씩 보인 것 역시 이때부터였다.
하지만 여왕의 성명만으로는 분노한 영국인의 마음을 완전히 다독일 수 없었다. 당시 언론은 장례식 인파는 여왕에게 여전히 적의에 찬 시선을 보냈고 분노에 찬 욕설도 현장에서 들을 수 있었다고 전했다. 분위기를 바꾼 것은 버킹엄궁 정문까지 나와 다이애나비의 관을 맞는 여왕이었다. 여왕은 경직된 표정을 풀지 않았지만 다이애나비의 관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여왕은 어디에 있느냐는 질문에 여왕이 내놓은 답이었다. 다소 뻣뻣하게 서있던 왕실의 일원들과 대비되는 여왕의 모습에서 영국인들은 그제서야 '할머니와 어머니'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여왕을 만났던 유명인사들도 여왕의 어머니같은 모습에 대해 언급해왔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여왕이 기분 나빠할 수도 있지만 나의 어머니를 떠올리게 했다"고 했고, 힐러리 클린턴 전 미 국무부장관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여왕의 겸손한 태도가 내 어머니와 같다"고 기억했다.
다이애나비 서거 이후 20년 넘게 영국 왕실은 실추된 명예와 대중적 인기를 회복하는 것에 심혈을 기울여 왔다. 그 중심에는 여왕이 있었다. 권위적인 모습에서 탈피하기 위해 파랑색과 노랑색 등 원색의 투피스를 즐겨 입으면서 스타일의 아이콘이 됐다. 2012년 런던 올림픽 개막식에서 제임스 본드와 함께 '본드걸'로 등장해 전세계인의 박수 갈채를 받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