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 싣는 순서 |
①한 핏줄부터 우리말 하는 중국인이라는 생각까지 ②"이거 먹어 봤어?"부터 "한국 좋은 사람 많아"까지 ③[르포]옌지는 지금 공사중…조선족의 서울 옌지를 가다 ④한반도 이주부터 중국공민이 되기까지 ⑤중국 동북지역 개척자…황무지를 옥토로 ⑥문화혁명 암흑기 건너 개혁개방의 주체로 (계속) |
연변대학은 중국에서 처음으로 세운 종합 민족대학이다. 민족 자치가 예상되지만 여기에 필요한 조선족 전문 인재를 양성해야 한다는 여론에 따라 중국공산당 지린성 위원회의 동의를 얻어 세워졌다.
당시 상황은 중국 당국으로부터 특별히 재정 지원을 받아 낼 형편이 아니었다. 그래서 모든 조선족들이 자발적으로 쌀과 돈, 학교에 필요한 물품을 무상으로 내놓았다. 북한에서도 학교를 짓는데 도움이 되도록 시멘트를 원조했다.
대학 명칭은 처음에 <동북 조선인민대학>으로 하기로 했지만 지명에 따른다는 원칙하에 <연길대학>으로 준비했다가 학교가 연길과 용정 두 곳에 갈라져 있어 연변대학으로 문을 열었다. 연변대 개교식에는 교사 57명, 학생 504명이 참가했다.
연변대학 초대 총장은 당시 중공연변지구위원회 서기 주덕해였다. 연변대학 한어문 간판글체는 1964년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 상무위원회 위원장이던 주더가 연변을 시찰할 때 쓴 글이다.
시련도 있었다. 문화대혁명기에 민족 분열주의를 조장하는 검은 거점으로 민족 대학을 박살내야 한다는 소리를 들어야 했고 민족 구성 비율이 조선족 80%, 기타 민족 20%에서 문화혁명 이후에는 전 반대가 되기도 했다. 민족 대학의 특성을 반영하는 조선어 학과와 한어 학과가 폐지되기도 했다.
현재 연변대학은 2천2백여 명의 교직원과 2만6천여 명의 학생을 보유한 211공정(중국 정부가 21세기에 100개 대학을 선정해 종점적으로 육성한다는 정책)에 든 중국내 100대 대학 가운데 하나다.
한국에 이승만이 있고 북한에 김일성이 있다면 조선족에게는 주덕해가 있다. 조선족 식자층에서 들을 수 있는 말이다.
주덕해는 1911년 러시아 연해주에서 태어났다. 여덟살 때 아버지가 토비에게 살해되자 살길이 막막해진 어머니 손길에 이끌려 아버지 고향인 함경도 회령으로 이사했지만 땅 한뼘도 허용하지 않는 곳에서 살 길이 보이지 않아 두만강을 건넜다.
젊은 시절 중국공산당에 가입해 항일 운동에 참여했고 모스크바 동방노동대학에서 공부하고 돌아와 1943년에 조선 혁명을 위한 간부를 양성하는 조선군 혁명 군정학교 총무처장직을 맡았다. 1949년 3월에 중국공산당 연변지방위원회 서기를 맡은 그는 중국 건국을 논의하는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정협) 제1기 전국위원회 1차 위원회에 참여했다.
1952년 9월 3일 연변조선민족자치구 성립을 선언했고 초대 주장, 자치주 정치협상회의 주석, 지린성 부성장 등의 직무를 맡았다. 연변대학 초대 교장도 그였다.
1950년대 후반 미족 정풍 운동때에는 지방 민족주의자로 찍혀 곤욕을 치렀고 문화혁명때는 군중에 붙들려 연변대학 창고에 감금된 채 모진 박해를 수없이 받아야 했다. 중국 전체가 거대한 고문장으로 변하자 주은래 총리는 노 간부들을 보호하기 위해 이들을 북경으로 피신시켰는데 주덕해도 이때 북경을 거쳐 우한으로 옮겨져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4인방이 타도된 뒤 그의 명예는 회복됐고 공적을 인정하는 조치도 취해졌다. 연변조선족자치주 주도인 옌지 시내 한복판에 있는 인민공원에는 20m 높의의 기념비 하나가 우뚝 세워져 있는데 주덕해 기념비다. 개혁개방의 지도자 가운데 한명인 후야호방이 직접 비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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