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 초유의 항공 테러에 맞서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 '비상선언'은 여타의 재난 영화처럼 악랄하고 두려운 존재가 영화 내내 상황을 지배한다거나 영웅적인 존재가 나타나 모든 상황을 거짓말처럼 해결하지 않는다. 영화가 조명하고자 하는 것은 재난 앞에 놓인 '사람'이다.
누군가는 다 같이 살려고 그런다는 말로 이기심을 포장하기도 하고, 누군가는 우리라도 살아야 하지 않겠냐며 내가 정한 '우리' 바깥의 '또 다른 우리'들을 사지로 내몰 결정에 찬성하기도 한다. 그러나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위험으로 뛰어들거나, 응원하고 기도하는 이들도 있다.
'비상선언'은 재난을 맞닥뜨린 인간이 보여줄 수 있는 모든 모습을 그려내면서 동시에 인간만이 만들어 낼 수 있는 '희망'을 전한다. '비상선언'을 통해 간접적으로 그리고 코로나19 팬데믹을 통해 직접적으로 재난을 마주한 한재림 감독에게 과연 '재난'은 무엇이며 이에 대처하는 우리의 모습에서 무엇을 보았는지 물어봤다.
재난, 그리고 재난 이후에 상황도 또 다른 '재난'
▷ 코로나19 팬데믹이라는 전 세계적인 재난과 맞물리면서 의도하지 않았지만 '비상선언'이 코로나 상황에 대한 은유처럼 느껴지게 됐다.
정말로 이런 일이 벌어지리라 상상도 못 한 채 이 기획을 선택했고 시나리오를 썼고 영화로 만들게 됐다. 영화를 만들려는 과정에서 이 이야기가 똑같이 현실에 펼쳐지는 걸 보고 정말 경악스러웠다. 지구에 사는 한 사람이자 재난의 당사자로서도 그렇지만, 관객들에게 재난영화라는 장르를 선보이는 감독으로서 마치 모든 게 다 스포일러 같았다.
정말 모든 게 관객에게 노출되는, 발가벗겨지는 느낌도 들었다. 하지만 역시 희망을 봤던 건 우리 인류가 이걸 현명하게 잘 해결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 영화가 담고 있는 것과 맞닿아 있는 걸 보면서 안도감을 느끼기도 했다.
▷ 재난이 발생할 때마다 반복되는 풍경이지만 영화로 보니 더 극적으로 와 닿은 장면이 있다. 비행기 착륙을 두고 찬반으로 갈려 시위를 벌이는 모습은 그 자체로 현실적이었다.
처음 시나리오가 나왔을 때 피켓 시위 장면을 보고 병헌 선배님이 '말이 되냐, 사람이 어떻게 이럴 수 있냐, 과장된 거 아니냐'라고 이야기했다. 우리가 영화를 촬영할 때 실제로 전 세계에서 비슷한 일들이 일어나서 굉장히 많이 놀랐다. 그러나 그들이 꼭 잘못했다고 비난하고 싶지 않았다. 영화를 보면 알겠지만, 착륙에 찬성하는 사람도 충분히 있다. 난 이게 인간이라고 생각한다. 두려움을 가질 수 있고, 그게 재난 앞에 선 사람들의 솔직한 심정인 거 같다.
그래서 예를 들면 영화 안에서 비즈니스석에서 이코노미석으로 승객들을 쫓아내는 사람도 나쁘게 그리고 싶지 않았다. 다만 인간으로서 그렇다는 걸 인정하고 좀 더 용기 내자는 마음인 거다. 코로나를 쭉 겪어오면서 점점 그렇게 되고 있더라. 자성하고 조금씩 나아가고 발전하고 있다. 인류는 재난 앞에 익숙해지지만 또 재난에 잘 맞서나가며 희망이 보이는 거 같아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게 잘 드러나고 있다고 생각한다.
▷ '비상선언'을 보면 직접 겪었거나 혹은 목격했던 저마다의 재난을 영화에 대입해 보게 된다. 아무래도 재난이 가진 속성을 영화가 그려내고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감독이 생각하는 '재난'이란 무엇인가?
재난은 원하지 않았던 상황이다.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자연재해도 있을 수 있고, 라스베이거스 총기 사건이나 9·11 테러나 한국의 여러 참사들처럼 인재(人災)도 있다. 이처럼 누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원하지 않았던 상황에 빠지는 게 재난이고 비극이다. 이러한 것도 재난이지만 비극 이후 맞게 되는 트라우마도 재난이다.
현재 팬데믹 시대에 사는 우리가 타인에 대한 두려움, 증오, 분노 등을 느끼고 이로부터 오는 것 역시 인간이기에 겪는 재난이다. 재난은 이런 여러 가지 포괄적인 뜻을 갖고 있고,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한다. 그럴수록 재난을 버틸 수 있게 만드는 우리의 용기를 생각하게 된다.
재난을 이겨낼 힘과 희망 역시 '인간'
▷ 이번 작품을 촬영하면서 그리고 실제로 팬데믹 한 가운데를 관통하면서 직·간접적으로 재난을 경험했다. 이를 통해 재난을 마주한 인간의 모습에 관해 어떤 생각을 했을지 궁금하다.
우리는 누구나 알 수 없는 것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이 있다. 재난은 특히 그렇다. 나도 재난 앞에서 과연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모르겠다. 두려움을 느끼는 건 당연하다. 예를 들면, 감염될까 두려워서 사람을 회피하게 되고 누가 감염되면 '집에 있지 왜 나와서 난리야'라고 말하기도 한다. 코로나인 것 같아도 나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집에 가는 선의를 지닌 사람도 있다.
이런 여러 가지 두려움과 상황 안에 인간은 각기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그런 게 모여서 이기심이 되고 서로 반목하기도 한다. 영화를 통해 보여주고 싶었던 건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에 두렵고 이기심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또 조금의 용기, 내 일에 대한 조금의 성실함이다.
지금 코로나 시국에도 의료진이 엄청나게 고생하면서 우리와 사회를 지탱시키고 있다. 이런 것들도 재난을 이겨나가는 조그마한 인간성이고 또 위대한 거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성실함과 조금의 용기가 재난 이겨낼 수 있는 것 아닌가 싶다.
▷ 영화는 공동체의 모습으로 시작해 공동체의 모습으로 마무리된다. 어려운 상황에서 공동체가 가진 힘, 연대를 강조하고 싶었던 건지 궁금하다. 그리고 공동체의 힘, 연대의 힘을 경험하거나 목격한 기억이 있다면 이야기를 듣고 싶다.
나는 코로나19 검사를 가면 의료진이 늘 존경스럽다. 이렇게 더운데 방호복을 입고 있는 사람들은 자기 성실함과 인류애가 아니면 어떻게 저런 일을 할 수 있을까 생각하게 된다. 그들을 위해 우리가 연대의 마음을 갖는 게 재난을 이겨내는 방법이라 생각한다. 아주 작은 예로, 코로나 초기에 이탈리아에서 사람들이 집 밖으로 못 나갈 때 각자 방에서 창문을 열고 노래하는 장면을 본 게 생각난다. 그때 그 사람들의 재난을 바라보는 태도, 연대감이 위대해 보였다. 우리가 인간으로서 굉장히 위대하다고 생각했다.
▷ '비상선언'을 관객분들께 한 줄로 설명한다면 어떻게 할 수 있을까?
힐링 받는 영화. 지금 재난을 맞이하고 있는데, 이 영화를 보고 가족과 나, 타인을 생각하면서 힐링 받고, 재난을 이길 수 있다는 희망을 얻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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