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별의별 '갑질 살인'…말단 직원도, 임원도 괴로워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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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임질 수 없어 떠납니다. 죄송합니다. 너무 힘들었어요. 마지막까지 죽기 싫은데 어쩔 수 없는 선택인 거 같아요. 과장님 차 좀 타고 다니세요. 업무 스트레스도 많이 주고…"

2019년 ㄱ씨는 휴대폰에 위와 같은 유서를 남기고 사업장 기숙사에서 사망했다. 한 차례 연기한 납품 기일이었다. 유족은 그가 일방적인 인사 발령 후 과도한 업무를 떠맡았는데, 부서 내 아무도 업무를 조정해주거나 도와주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사망하기 전 6개월 동안 그의 업무시간 외 통화량은 500건이 넘었다. 또 그는 2년 동안 직속 상사에게 출·퇴근 시 '카풀'을 해주며 개인 기사 노릇을 하기도 했다.

최근 한 해 평균 약 100명이 '업무상 스트레스'로 사망한다. 지난해 산업재해로 승인된 자살자 수는 일반 회사원, 공무원, 군인 등을 포함해 총 114명이었다. 산재 보상 심의 기관은 직군에 따라 다른데, 고용노동부 산하 근로복지공단에서 심의하는 사기업·공기업 노동자들은 그중 88명이었다. CBS노컷뉴스는 기본소득당 용혜인 의원실이 근로복지공단으로부터 제출받은 '2017~2021년 정신질환 사망(자살) 산재 업무상 질병 판정서'를 단독 입수해 전수 분석했다.

19일 취재를 종합하면 지난해 이의제기 없이 1차 조사만으로 산재로 인정된 경우는 78건이었다. 이들은 동료 혹은 상급자의 괴롭힘, 외부 민원으로 인한 갈등, 바뀐 회사 상황으로 인한 업무 환경 악화 등 다양한 이유로 업무상 스트레스를 받았고 끝내 목숨을 끊었다. 공통점은 근로기준법 제76조의2에서 금지하는 '직장 내 괴롭힘'이 행해졌다는 것이다.


개인을 극단적 상황으로 내모는 회사…업무 적정 범위 넘어


그래픽=김성기 기자

2019년 7월 시행된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은 사용자(회사) 또는 근로자가 직장에서의 지위나 관계 등의 우위를 이용해 업무상 적정범위를 넘어 다른 근로자에게 신체·정신적 고통을 주거나 근무환경을 악화시키는 행위를 금지한다. 회사가 근로자의 '업무상 적정 범위'와 '적절한 근무환경'을 지켜줘야 한다는 의미로도 해석되지만 그렇지 못한 때가 많았다.

개인의 실수와 회사의 방관이 죽음을 불러왔다. 2020년 ㄴ씨는 병원에서 환자를 이송하다 환자의 손가락이 문틈에 끼어 골절된 사고로 민·형사 소송에 휘말렸다. 무기계약직 신분이던 ㄴ씨가 정규직 전환을 3개월 앞둔 시점이었다. 그는 해고당할지 모른다는 불안감과 스트레스로 '정상적 인식 능력이 저하된 상태에서' 극단적 선택을 했다.

10년 넘게 피부과 안내데스크 총괄실장을 맡았던 ㄷ씨는 잇따른 고객의 폭언과 동료 직원 폭행, 무례한 언행, 성희롱으로 업무 부담이 컸다. 원장이 직원들에 대한 보호조치에 소극적인 가운데 하루 60~80명에 달하는 고객을 응대했다. 2019년 3월 사망일에는 혼자 안내데스크에서 근무하며 일부 고객으로부터 욕설을 듣기도 했다. 사직 의사를 표했지만 사업주의 권유로 계속 일하던 상황이었다.

사측의 잘못으로 개인이 피해를 보거나 책임을 뒤집어쓴 사례도 있었다. 회사에서 가스 유출 사고가 나고서 회사의 책임 회피를 위해 허위 진술을 강요받던 ㄹ씨는 양심의 가책을 받다가 생을 마감했다. ㅁ씨는 사업 비리를 보고했다가 오히려 외부에 자료를 유출했다며 감사를 받았다. '배신자'로 낙인찍힌 그는 중징계를 앞두고 사망했다.


임원도 '직원 관리' 괴로움에…탈원전·코로나19 상황도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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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소기업 상무이사이자 경영지원본부장으로 재직하던 ㅂ씨는 회사 경영 악화로 기업 회생 절차를 신청하고 죄책감에 시달렸다. 2016년부터 2년 넘게 회생 절차를 밟으며 그는 자신의 잘못된 선택으로 채권자, 주주, 공사협력사, 관계회사 및 직장 동료 등에게 피해가 발생했다고 생각했다.

또 다른 중소업체 연구소장(상무이사) ㅅ씨도 회사 경영 악화로 2020년 7월경 대표이사로부터 팀원들을 구조조정 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부당한 구조조정이라 생각한 ㅅ씨는 대표이사와 언쟁을 빚고 결국 해고까지 당했다. 두 회사 임원 모두 '산재 자살'로 인정받았다.

외부 상황으로 업무 환경이 악화해 개인에게 돌이킬 수 없는 충격을 주는 경우도 있었다. 1992년 원자력 관련 기업에 입사했던 ㅇ씨는 2015년부터 업무에 대한 부담감을 호소했다. 그러다 2018년 부처장 승진에서 미끄러지고, 당시 정부의 '탈원전 정책'으로 담당 업무가 중지되면서 스트레스가 가중됐다. 부서 존폐를 걱정하던 그는 부서가 바뀐 뒤에도 우울감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코로나19 유행도 직장인들을 벼랑 끝으로 내몰았다. ㅈ씨는 학창시절부터 꿈이었던 승무원이 돼 2015년부터 국내 굴지의 항공사에서 일했다. 코로나19로 항공 수요가 급감해 강제 휴직 중에도 그는 영어 시험에 응시해 사내 영어 등급을 획득했다. 그러나 겸직 금지 규정으로 아르바이트도 못 하고, 복직은 기약이 없어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사망은 코로나19 사태 후 항공업계 최초로 산재로 승인된 것으로 알려졌다.

시민단체 직장갑질119 박점규 운영위원은 "직장 갑질로 극단적 선택을 토로하는 제보자들에게 우선 '당신 잘못이 아니다'라고 답한다"며 "스웨덴 등 유럽 선진국 연구 결과에 따르면 회사 시스템이 잘 갖춰져 있으면 직장 내 괴롭힘은 발생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직장 내 괴롭힘은 회사 책임이라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직장 내 괴롭힘을 당하고 있거나 회사에서 힘들어하는 분이 있다면 첫번째는 이걸 예방하지 못한 회사의 잘못이고, 두번째는 괴롭힘 가해자의 잘못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으면 좋겠다"면서 "지금이라도 당장 병원에 가서 정신과 진료를 받고 힘들었던 얘기를 털어놓으면 괴롭힘 증거가 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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