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다른 일로 바빠서 서경이 먼저 초고를 쓰기로 했다. 아마 천지간에 아무도 없이 버림받은 기분이었을 게다. (중략) 이 바닥 사람이라면 다 알지. 잠재력 가진 초고를 만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중략) 그래서 초고가 어땠냐고? 난 웃었지. 밑그림이나 좀 그려 두랬더니 채색까지 적잖이 해놓았으니까, 사람 당황스럽게. 작가가 워낙 단순한 기교를 능가하는,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재능을 가진 덕분이었다." 박찬욱 감독, 영화 '아가씨' 각본집 작가의 말 중
'헤어질 결심'은 박찬욱 감독과 정서경 작가의 5번째 작품이다. '친절한 금자씨'를 시작으로 '싸이보그지만 괜찮아' '박쥐' '아가씨'까지 4개 작품의 각본을 함께 집필하며 독보적인 작품 세계를 구축해 왔다. 이들이 함께 탄생시킨 파격적인 이야기 구성과 강렬한 소재는 모두의 이목을 사로잡았다.
그리고 두 사람이 함께하는 매 작품 뇌리에 깊숙이 박히는 입체적인 캐릭터들을 선보이며 관객과 평단의 호평을 불러 모았다. 지난 14일 서울 종로구의 한 카파에서 만난 정서경 작가는 박 감독과 오랜 세월을 함께할 수 있는 원동력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자기 자신을 찾아 오르페우스가 된 해준
▷ 누군가는 '헤어질 결심'을 보고 오타쿠(한 분야에 깊게 심취한 사람을 뜻하는 일본어)들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좋은 의미이고, 그만큼 많은 관객의 마음을 설레게 하고 짙은 여운을 남기며 계속 보고 싶고 이야기하고 싶게 만든다는 뜻이다.
시나리오를 쓸 때 그 밑에 일단 여러 가지 이야기가 흘러야 하는데, 첫째 여러 인물의 이야기가 흐르고, 두 번째 여러 시간이 흐른다. 나는 여러 의미가 흐르도록 신경을 많이 쓴다. 겉으로 볼 때는 이런 뜻이지만 밑으로 볼 때는 메타포일 수 있는 그런 이야기 말이다.
영화를 보고 마지막 장면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데, 왜 그랬을까 생각을 오래 했다. 마지막에 합쳐지는 뭔가도 있겠지만, 그 순간에 해준(박해일)은 한 사람에서 벗어나 신화에 나올 법한 인간이 됐다고 생각했다. 아내를 찾아 이승과 저승 사이를 헤매는 오르페우스 말이다.
평생 찾아 헤매는데 '그게 사랑하는 사람일까?' 생각하면 난 그게 '자기 자신'이라는 생각이 들더라. 해준은 바로 발밑에 있는 걸 찾지 못하고 헤맨다. 그 장면 안에는 해준과 서래의 이야기가 흐르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어떤 공통된 연인들의 이야기가 흐르고, 또 자기 자신의 잃어버린 면을 찾아 헤매는 보통 사람의 이야기가 흐른다.
해준이 잃은 것은 '야생성' 같은 거다. 난 폭력에 익숙한 게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가족 위해 폭력을 휘두를 수 있어야 하고 먼 과거에는 사냥하기 위해서 폭력을 사용했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잃어버린 야생성을 찾고 있다고 생각했다. 보는 사람마다 어떤 사람은 이걸 보고 어떤 사람을 저걸 볼 수 있는, 여러 층의 이야기가 흐르고 있다.
웃기려고 한 게 아니라 본인이 너무 웃겨서 쓴 거다. 나는 감독님이 그렇게 쓰면 그냥 놔둔다.(웃음)
▷ 박찬욱 감독은 마르틴 베크 시리즈와 노래 '안개'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했는데 작가에게도 영감을 준 콘텐츠가 있나? 그리고 혹시 감독이 한번 보라고 권한 작품이 있을까?
평소 감독님이 옛날 구성진 노래를 좋아하신다. 그런데 나는 음악을 듣지는 않고 안개에 대해 이해하려 노력했다. 산과 바다로 설정이 정해졌고, 이 사이 안개가 메운다는 건 상당히 논리적이다. 산이면서도 바다다. 물인데 높이가 있다.
그리고 실제로 나는 작업하면서 기분이나 느낌을 시나리오 어디에도 적지 않는다. 대부분 동사와 명사로 이뤄진 행동, 스크린에 나타날 행동만 적는다. 그래서 어떤 기분에 빠져드는 게 좋지 않다고 생각해서 노래를 안 들었다.
그리고 감독님이 '밀회'(감독 데이비드 린)를 보라고 했다. 원래 알고 있던 영화지만 그때 감독님이 엄청 재밌는 것처럼 말씀하셨는데 그렇게 딱히 막 다가오진 않았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감독님이 정확히 보셨던 거 같다. 이 영화가 안타깝게 엇갈리는 마음, 몸이 아니라 마음의 이야기라는 것도 정확한 것 같다.
정서경 작가와 박찬욱 감독의 공통점
▷ '친절한 금자씨'로 시작해서 '헤어질 결심'까지 박찬욱 감독과 벌써 다섯 번째 공동 각본 작업을 했다. 오랜 세월 함께 작업할 수 있는 원동력이랄까. 어떤 점에서 박찬욱 감독과 잘 맞아서 작업을 이어가고 있는지 궁금하다.
감독님과 내 뇌 구조가 비슷한 거 같다.(웃음) 우리 둘의 뇌가 실용적인 형태로 되어 있다는 게 비슷하다. 처음에 '친절한 금자씨'로 함께 일할 때는 비슷한 사람인지는 잘 몰랐다. 감독님과는 1 다음에 2, 2 다음에 3, 이런 식으로 대화가 이뤄지는데 막상 다른 작업을 하기 위해 다른 분과 이야기하다 보면 아이디어를 설명하는 순간이 많았다.
박찬욱 감독님과는 다른 설명이 필요 없이 이해가 가능하다는 게 장점이다. 그리고 감독님과 70%가 비슷하다면 30%는 다른 거 같다. 난 다른 부분을 조금 더 많이 갖고 있어야 서로 부족한 부분도 채울 수 있고 흥미도 지속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 그리고 시나리오를 쓰면서 이미지나 사운드도 고민하지만, 그걸 이루는 말들에 대해 고민하는 게 공통점인 것 같다.
재밌었던 게 이제까지 썼던 영화 중 영화를 본 사람들한테 가장 연락을 많이 받은 영화다. 이 영화는 사람들에게 개개인으로 다가가는 것 같다. 처음 쓸 때는 '사랑한다'는 말을 쓰지 않으면서 사랑한다는 걸 전해보는 게 목표였다. '저 폰을 바다에 버려요'와 같이 일상에서만 쓰는 언어를 이용해서 사랑한다는 것처럼 들리게 하는 게 과연 쉬운 일일까 의문이 있었다.
70%만 이해해도 성공일 거라 생각했는데, 그게 관객들에게 다가갔다. 직접 뚜벅뚜벅 다가와서 사랑한다고 만들어 낸 건 관객들이다. 그 어떤 영화보다도 관객들이 영화에 많이 들어왔어야 하고, 자발적으로 깊이 들어가 생각하는 작품이다. 그전에는 관객이 영화를 '보는 것'에 가까웠다면, 이 영화는 관객들이 영화로 걸어왔다는 느낌이 들었다.
'헤어질 결심'은 관객들이 완성해야만 완성되는 영화다. 영화를 볼 때 느끼는 놀라움을 체험하는 영화였던 거 같다. 그래서 나한테 다가와서 영화에 관한 이런저런 의미들을 설명해주는 게 새롭고 즐거웠다. 그렇게 의미를 완성해 주시는데, 정말 감사하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