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다른 제작사 쪽에서 저희(해고 스태프들)가 무슨 (무리한) 요구 조건을 이야기했냐고 묻더라고요. 제가 아니라고 했더니 거긴('미남당' 제작사) 그렇게 이야기를 안 했다고 했습니다. 저희에 대한 안 좋은 소문이 업계에서 실제로 나고 있는 거죠." ('미남당' 해고 스태프 B씨)
KBS 2TV 월화드라마 '미남당' 해고 스태프들이 6개월 동안 겪은 현장은 그야말로 인간의 기본권조차 사라진 사각지대였다. 촬영 시작부터 지난 5월 31일 계약 해지까지 대체 이들에겐 무슨 일이 있었던 걸 불합리한 관행에 침묵할 수밖에 없었던 드라마 스태프들이 이렇게 공개적으로 나서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미남당'은 최근 스태프들의 계약을 해지하면서 불법 해고 및 근로기준법 위반 논란에 휩싸였다. 공공운수노조 희망연대본부 방송스태프지부(이하 노조)에 따르면 스태프 10여 명이 주 52시간을 넘어선 장시간 근로 등 기존 계약서 문제를 지적하며 노사 협의를 통해 근로기준법에 맞는 근로시간과 휴게를 보장해 달라고 요구했으나 제작사 측은 5월 31일로 예정된 촬영 일정을 일방적으로 취소하고 계약 해지를 통보했다.
제작사는 "주 52시간을 준수했고, 계약 해지가 아닌 종료"라고 해명했지만 결국 '미남당'은 지난 4일부터 남은 촬영 기간인 7월 말까지 고용노동부로부터 수시 근로감독을 받게 됐다. 해고 스태프들도 지난달 22일 '미남당' 현장의 근로기준법 위반 사항들에 대한 처벌, 야간수당, 초과수당 등 미지급된 수당들에 대한 지급 조치를 요구하는 집단 진정을 냈다.
CBS노컷뉴스는 지난 6일 양천구 목동의 한 카페에서 '미남당' 해고 스태프 2명과 만나 이번 사태와 관련된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근로기준법 아니라 '밥시간'만 지켜줬어도…"
"개개인 용역 계약을 했어요. 최대 13시간 근로를 합의 하에 동의했고요. 원래 표준 근로계약서도 1시간은 합의 하에 최대 13시간 일할 수 있거든요. 우리가 그렇게 진행할 수 있는 날은 해주겠다는 거였는데 13시간, 4일 연속 일을 했어요. 그런 건 계약서에 없는 내용이었죠. 하루 근로 시간만 넣어서 애매하게 장치를 해 놓은 거예요. 솔직히 계약 사기라고 봅니다. 겉으로 보기엔 주 52시간을 지킨 것처럼 돼있는데 막상 현장은 그렇지 않았던 거죠. 계약서를 지키겠다고 해도 실상 현장에서 그렇게 되기 어려운데 처음부터 지킬 생각이 없었던 겁니다. 만약 4일 연속 13시간 일하는 계약서였으면 내용을 바꾸든, 사인할 일은 없었을 거예요." (B씨)
10년 경력의 잔뼈가 굵은 스태프 A씨도 방송·영화 현장에 주 52시간 제도가 적용된 이후, '미남당' 같이 열악한 현장은 오랜만이었다. 바로 회사에 출근하는 일반 직장인들과 다르게 이들 스태프는 특정 장소에 집합해 한 번 더 버스를 타고 촬영 장소로 이동한다. 또 각 팀마다 차이는 있지만 촬영 전후에 장비 세팅 시간이 소요된다. 최근 많은 현장에서 이동 시간, 장비 세팅 시간 등을 근로시간으로 인정해주는 추세다. 즉 '12시간 근로' 안에 이동 시간·장비 세팅 시간이 포함된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미남당'은 순수하게 '촬영 시간만' 근로시간으로 인정했다. 당연히 스태프들의 수면 시간은 부족해질 수밖에 없었다.
"순수 촬영 시간만 13시간이면 휴게 시간 2시간, 세팅 시간까지 포함해서 실제 현장에 나가있는 시간이 16~17시간이거든요. 이동 시간까지 하면 18시간이 돼요. 촬영장에 9시까지 출근하려면 저는 오전 6시 반에 일어납니다. 집합해서 이동해야 되니까요. 마치고 집에 오면 새벽 3시니까 4시간도 잠을 못 자고 또 다음날 일을 나가는 거예요. 정말 바쁠 때는 2~3시간 밖에 못 잘 때도 있었어요. 촬영장 인근 숙박을 요청해도 잡아 주질 않아, 저희 사비로 잡아서 많이 자면 6시간 정도 잤죠." (B씨)
"주 52시간을 지키려는 현장들은 집합부터 촬영 시작 전까지 근로 시간으로 인정을 해줍니다. 그게 다 12시간 안에 포함돼 있는 거죠. 영화는 세팅 시간까지 보장해주는데도 있고요. 그런데 지상파 방송 3사 기준은 완전히 달라요. 경기권 내는 일단 2시간 걸리는 연천을 가도 지방이 아니라 이동 시간을 안 빼줍니다. 지방 촬영을 가면 빼주는데 3시간을 간다고 치면 경기도를 벗어난 시점부터 빼주더라고요." (A씨)
하다 못해 현장은 식사 시간마저 들쭉날쭉했다. 오후 2시에 점심을 먹고 5시에 저녁을 먹거나, 오전 10시에 점심을 먹고 밤 9시에 저녁을 먹는 등 밥조차 제시간에 먹을 수 없었다. 스태프들은 언제 밥을 먹는지 알 수 없는 채로 그저 눈치만 보며 촬영에 임해야 했다. 이들의 요구 조건은 간단했다. '최소한의 식사 시간과 수면 시간을 보장해 달라'. 6개월 동안 서로 책임 떠넘기기만 할 뿐, 제작사와 방송사 누구도 스태프들의 고충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처음부터 근로기준법 지키라고 한 게 아니에요. 촬영 3개월이 지나서 최소한 식사 시간과 수면 시간은 지켜 달라고 요구했어요. 특히 밥 시간이요. 왜 이야기가 통하지 않는지 모르겠지만 촬영 4~5개월까지도 제작사가 연출부 설득을 못하더라고요. 노력하겠다, 잠깐 말뿐이고 계속 그랬어요. 밥 시간이 늦어질 거 같으면 공지라도 해 달라고, 그거 하나를 붙잡고 또 몇 달을 이야기했어요. 그것도 안됐고요. 그런 상태로 6개월이 가니까 이건 '갑질'이고, 더 이상 말로 해서는 안되겠다 싶었어요. 그래서 이럴 거면 근로기준법 다 준수해서 가자고 한 거죠." (A씨)
그렇게 6개월 간 반복된 고통 속에 이들이 노조의 도움을 받으려 하자 그제야 제작사 피플스토리컴퍼니(이하 제작사)는 '노조를 빼고 협상하자'고 제안해왔다. 드라마 현장에 최초의 노사 협의 선례를 남길 수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이야기가 안 통하니까 노조에 도움을 청해보자고 의견이 모였어요. 처음에는 제작사 대표가 나오겠다고 했는데 노조와 만나는 자리에도 결국 총괄 PD만 나왔어요. 그 자리에서도 서로 남 탓으로 책임을 미루더라고요. 제가 직접 들었지만 근로기준법은 준수 못한다, 다른 요구 조건은 안되고 밥 시간은 지켜주겠다, 요구 조건을 다 들어줄 수 있어도 협상 테이블에서 노조를 빼라고 하더라고요. 노조가 포함된 협약서에는 사인할 수 없고, 자료를 공식적으로 남기고 싶지 않다고 했어요. 선례를 최초로 남기고 싶지 않다고요. 저희는 그 자료가 남아야 다른 현장도 바뀔 수 있으니 노조가 있어야 된다고 반대했고요." (B씨)
"근로계약서 실종된 현장…블랙리스트 공공연해"
"요즘엔 방송 3사와 스튜디오 드래곤 외에는 대부분 표준 근로계약을 하긴 해요. 그냥 그게 방송 3사 기준이에요. 경기권 이동 시간은 근로시간으로 안 치고, 촬영 종료와 시작 시간 마음대로 정하고…. 한국방송협회(이하 방송협회) 제작 지침이 있는데 그게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거라고 하더라고요. 제작사는 방송협회에서 공지가 없으면 요구를 들어줄 수가 없다 그러고, 방송사는 제작사가 알아서 했다, 이런 식이에요. 그런데 본사 정직원들이 참여하는 오리지널 드라마는 얼마나 철저하게 근로기준법을 지켜서 찍는지 몰라요. 결국 이런 제작 지침도 외주 지침인거죠." (A씨)
설상가상 이번 사태가 공론화 되자 업계에서는 이들 스태프가 무리한 요구를 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실제로 가혹한 근로 조건에 지쳐 반기를 드는 스태프들에 대해 공공연한 블랙리스트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라고.
"지금 저희에 대해 난 소문은 '터무니 없는 요구를 해서 들어주지 않았다'. 다른 제작사에서 무슨 (무리한) 요구 조건을 이야기 했냐고 물어봐서 아니라고 하니까 '거기('미남당' 제작사)에서는 그렇게 이야기 안 하더라'고 그러더라고요. 저희가 결국 요구한 건 '주 52시간 준수해 달라' 이것 뿐이었어요. 다른 요구 조건은 건 적도 없어요. 제작사에서는 배우들이 코로나19 걸려서 1~2주 쉰 기간을 다 쳐서 주 52시간을 준수했다고 하는데 그런 계산법은 맞지 않죠." (B씨)
"예전에 블랙리스트에 올라서 2~3년 간 일 못하는 스태프들도 있었죠. 일을 아예 주질 않으니까 이런 이야기를 하기도 힘들고요. 표준 근로계약서 쓰자고 했을 때도 연장 근로시간만 준수해 달라고 했을 뿐이에요. 법정 휴게시간이나 다른 조건은 다 양보하겠다고 했어요. 그 하나를 안 해준 거예요." (A씨)
이들 스태프는 결코 소수가 아니다. 현실적으로 제작사에 문제 제기가 가능한 스태프는 업체 소속이 아닌 개별 계약을 한 스태프들이다. 현재 개별 계약을 한 스태프들 18명 중 현장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6~7명에 불과하다. 심지어 그들도 정상적인 계약을 통해 복귀한 게 아니며 일부는 해고 스태프들과 연대하고 있다.
"어쩔 수 없이 복귀한 친구들이 있는데 계약 조건에 만족해서 간 게 아니에요. 현장에 있는 인간적인 관계 속에서 도와주려고 간 거죠. 이 중에서도 저희와 함께 진정서에 이름을 올려 싸우고 있는 친구들이 있고요. 지금 재계약한 계약서를 아직도 받지 못하고 있다고 하더라고요. 이전과 똑같은 계약서를 만들면 불법이고, 그렇다고 수정하면 불법임을 인정하는 셈이 되는 거니까요." (B씨)
그동안 작성한 10장의 계약서 안에서 B씨는 명백한 근로자였다. 하는 업무가 달라진 것도 아니다. 그런데 '미남당' 현장에 오자 그는 갑자기 근로자의 권리를 주장할 수 없는 프리랜서가 됐다. 그는 이번 사건이 드라마 현장에서 작은 변화의 불씨가 되길 바라고 있다.
"제작사나 방송사는 신고할 스태프들이 없다고 생각했고, 저희는 할 수 없었고, 그렇게 몇십 년 동안 불법적 관행이 흘러온 거죠. '이런 일이 생기겠냐'는 생각에 당당하게 근로기준법을 어긴 거라서 결국 문제가 된 겁니다. 저희가 싸워서 정상화되는 기간이 더 단축됐으면 하는 바람이에요. 이 사건을 많은 스태프들과 제작사들이 알아야 앞으로 법을 잘 지키는 분위기가 만들어질 거라고 생각해요." (B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