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이 지난 정부에서 묻혔던 사건들에 대한 수사 필요성을 언급하면서 경찰에 사실상 '수사 가이드라인'을 준 게 아니냐는 논란이 일고 있다. 이른바 '경찰국' 신설 등 행안부의 경찰 통제 움직임이 궁극적으로 수사 관여에까지 이를 수 있다는 지적이 제기되는 셈이다. 인사 제청권 강화와 함께, 이 장관의 그립(장악력)이 갈수록 강해지면서 경찰 조직을 둘러싼 긴장감은 커지고 있다.
행안부 장관에게 힘이 실릴수록 경찰 수장인 경찰청장의 힘이 상대적으로 빠질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일선 반발이 큰 경찰국 신설에 대한 입장도 난감한 상태다. 윤희근 신임 경찰청장 후보자는 경찰국에 대해 '경찰의 민주적 통제와 중립성이 양립해야 한다'며 공감하면서도 의견 개진의 뜻을 밝혔다. 이미 정부가 '답'을 정해 놓은 통제 방침에 사실상 따를 수밖에 없는 상황인 데다가, 장관의 거침 없는 행보가 이어지면서 일각에선 '식물 청장' 우려가 벌써부터 나오고 있다.
이상민 "지난 정권 수사 안된 게 꽤 있어"…'수사 가이드라인' 논란
이 장관은 5일 차기 경찰청장 임명 제청 동의 안건을 심의하는 국가경찰위원회 임시회의 참석 전 기자들과 만나 '수사 가이드라인' 논란과 관련한 질문에 "이 자리에서 말씀드리기 적절치 않다"며 "시간이 되면 찬찬히 말씀드리겠다"라고 밝혔다. '수사 중립성' 침해 우려에 대한 질문 역시 "수사는 예민한 문제여서 이 자리에서 언급하기 적절치 않은 것 같다"라고 말했다.앞서 이 장관은 4일 언론 인터뷰에서 "지난 정권에서 수사가 됐어야 할 것들 중 수사가 안 된 것들이 사실 꽤 있다"며 "(정치보복으로) 볼 소지도 없지 않지만 뻔한 잘못을 가만 놔두는 것은 정말 불공정한 것"이라고 밝혔다. 서해 공무원 피살 사건 등 문재인 정부에서 묻혔던 사건들에 대한 수사 필요성을 언급한 셈이다.
행안부 장관의 '수사 필요성' 발언을 두고 경찰 내부는 또 다시 동요하는 분위기다. 수사 라인의 한 경찰 관계자는 "행안부 장관이 수사에 대해 언급하는 건 처음 봤다"며 "경찰 통제에 속도를 내는 마당에 그 끝에는 수사를 건들 수 있다는 내심을 보인 게 아니겠는가"라고 밝혔다. 또 다른 경찰 관계자는 "경찰 통제 움직임이 예고편이라면 본편은 수사일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최근 이 장관의 지시로 꾸려진 행안부 경찰자문위원회(자문위)의 권고안에 따르면 행안부 내 경찰 인사 및 정책 등을 담당하는 지원조직 신설, 행안부 장관의 경찰청장에 대한 지휘 규칙 제정, 경찰 고위직 인사제청에 관한 후보추천위원회 또는 제청자문위원회 설치 등이 담겨 있다. 수사 관여에 대해서 자문위는 선을 그었지만, 인사권 및 감찰권 등에 대한 주도권을 쥔 뒤 그 다음 수순으로 수사권을 넘보는 게 아니냐는 지적이다.
이웅혁 건국대 경찰학과 교수는 "장관이 수사를 언급한 부분은 생뚱맞다. 결국 인사권, 감찰권을 통해서 수사에 영향력을 행사하겠다는 발언으로 들릴 수밖에 없지 않느냐"며 "행안부 장관은 국무위원이고 정무 감각을 갖췄다는 점에서 여러 해석이 나올 수밖에 없다"라고 밝혔다.
궁극적으로 경찰 수사 중립성을 훼손할 수 있다는 의심의 시각은 최근 검경 협의체 가동과 함께 더해지고 있다. 협의체는 현 정부 들어 이른바 '검수완박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 후속 조치를 논의하기 위해 꾸려졌는데, 구성원 중 과반이 검사 혹은 친검 성향의 인사라 시작부터 '기울어진 운동장'이라는 지적이 일고 있다. 또 협의체에서 수렴된 의견이 법무부 장관에게 전달된다는 점 등에서 경찰은 사실상 '들러리' 아니냐는 비판도 제기된다.
행안부의 경찰 통제 가속화 및 인사 주도권과 검경 협의체의 '기울어진' 수사권 조정까지 겹쳐질 경우, 결국 파장은 경찰 수사 총책인 국가수사본부까지 뻗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다만 이 장관은 논란을 의식한 듯 5일 오후 정부세종청사에서 개최한 경찰청장 후보자 제청 관련 브리핑에서 '수사 가이드라인'에 대해 "수사는 경찰청에서 알아서 하는 거고 내가 수사에 대해 이래라저래라할 수 없고 해서도 안 된다"며 "수사는 굉장히 정치적 중립성이 요구되고, 자율적이고 책임 있는 수사가 중요하기 때문에 경찰청 내부에서 수사를 지휘하는 것은 몰라도 한 단계 건너 있는 행안부에서 수사를 지휘한다는 것은 대단히 적절하지 않다고 판단한다"고 선을 그었다.
거침 없는 행안부 장관, '식물 청장' 우려…거세지는 일선 반발
거침 없는 이 장관의 행보가 이어지는 가운데, 신임 경찰청장 후보자로 윤희근 경찰청 차장이 내정되면서 향후 행보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행안부의 경찰 통제 움직임이 본격화되고, 일선 반발 역시 거세지는 상황에서 상당한 '험로'가 예상되는 상황이다.윤 후보자는 일단 '경찰국' 신설에 대해 이 장관과 보조를 맞추면서도 의견 개진을 하겠다는 입장이다. 그는 이날 국가경찰위원회 임시회의에서 경찰청장 임명 제청 동의안이 통과된 후 기자들과 만나 "경찰 권한과 역할이 민주적 통제 하에 이뤄져야 한다는 것과 경찰권의 중립성과 책임성 가치가 존중돼야 한다는 것은 양립해야 한다"며 "구체적 부분은 행안부의 협의 과정을 거쳐 가면서 최대한 (경찰) 의견이 반영되게 하겠다는 말씀을 드렸다"고 밝혔다.
윤석열 정부에서 내정된 초대 경찰 수장으로 국정 방향에 공감하지만 일선의 반발도 다독이겠다는 차원으로 해석된다. 다만 앞서 행안부 통제에 반발했던 경찰청의 입장과 배치될 뿐더러, 행안부와 일선 사이 '불안한 줄타기'라는 지적도 제기된다. 일선 한 경찰관은 "현장에선 삭발과 단식까지 불사하며 투쟁하는데 14만 수장인 신임 청장이 그대로 옳지 않은 정부 방침에 고분고분 따라선 안된다"라고 말했다.
경찰 직장협의회 등 일선에서는 이 장관의 "정치적 행위"라는 발언에 분노를 감추지 못하는 상황이다. 이 장관은 '일선 경찰의 반발을 정치적 행위로 보느냐'는 취재진 질문에 "일선 경찰의 반발이 아니라 직협의 단체 행동"이라고 강조하며 "일부 야당의 주장에 편승하는 듯한 정치적 행위"라고 말했다. 직협 측에서는 "14만 경찰에 대한 명예훼손"이라고 반발하고 있다. 이날도 세종시 행안부 앞에서는 일선 경찰관들이 삭발식과 단식 투쟁을 이어갔다.
윤 후보자는 일선 반발에 대해 "우리 현장 직원들이 염려하고 우려하는 목소리에 대해서는 후보자로서 충분히 공감하고 그만큼 우리 경찰에 대한 애정에서 비롯한 것으로 생각한다"며 "내정자 신분이지만 경찰청장 직무대행 입장에서 현장의 소리를 최대한 경청하면서 국민의 우려가 발생하지 않도록, 합리적인 방법으로 의사를 표시할 수 있게 하겠다"고 밝혔다.
한편 윤 후보자는 또 행안부에서 인사권과 감찰권을 주도하면서 청장의 힘이 빠질 수 있다는 우려에 대해선 "동의하지 않는다"며 "인사권과 관련해서는 장관의 법적 권한이라 할 수 있는 인사 제청권 등을 보좌할 지원 조직을 신설하겠다는 내용 정도로 이해하고 있다. 감찰권도 법적 제정이 전제되지 않는 한 어려운 부분으로 이해한다"고 말했다.
이어 "경찰청장은 분명히 인사 추천권을 갖고 있고, 청장의 인사권과 장관의 제청권이 충분히 협의를 거쳐 조화롭게 행사된다면 청장의 인사권이 형해화된다는 우려는 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씀을 분명히 드린다"고 강조했다.
이밖에 이 장관의 '수사 가이드라인' 논란에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는 "해경에서 있었던 사건을 예로 든 것으로 알고, 경찰과 관련해서는 구체적 보고를 듣지 못해 사안을 좀 파악해보고 말하겠다"고 말을 아꼈다.
경찰 통제와 수사 가이드라인 등을 둘러싼 논란은 향후 있을 청문회에서 더욱 쟁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경찰청장 인선은 후보자 추천, 국가경찰위원회 동의, 행안부 장관 제청, 국회 인사청문회, 대통령 임명 절차 순으로 진행된다. 윤 후보자는 이날 김순호 경찰청 안보수사국장(치안감)을 단장으로, 김성희 경북경찰청 자치경찰부장(경무관)을 부단장으로 하는 10명 규모의 인사청문회 준비팀을 구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