텍사스 초등학교 총기 난사 사건으로 어린이 19명 등 21명이 숨진 사건을 계기로 미국 전역에 총기 규제의 목소리가 다시 높아지고 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18살이 상점에 들어가 살상용 무기를 살 수 있다는 것은 잘못됐다"고 개탄했다. 미국 전역에는 텍사스 초등학교 총기난사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총기 규제를 촉구하는 시위가 열리기도 했다.
하지만 변화는 요원해 보인다. 현지 언론에서는 상원에 계류돼 있는 총기 규제 관련 법안이 통과될 가능성을 희박하게 보고 있다. 왜 미국은 끔찍한 사건이 반복되고 있는데도 기초적인 총기 규제 액션조차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① 돈 뿌리고 정치인 줄 세우는 'NRA'
가장 크게 작용하는 것이 전미총기연합회(NRA)가 뿌리는 돈과 로비 때문이다.
NRA는 남북전쟁 직후인 1871년 북군(北軍) 장성들의 주도로 결성돼 151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회원수는 500만명으로 추산된다.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존 F. 케네디, 리처드 닉슨, 로널드 레이건, 조지 H W 부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등 10명의 대통령이 NRA 회원이었다. 다수의 부통령들과 대법관, 의원들도 회원이었을 정도로 미국 내에 막강한 인맥을 구축하고 있다.
NRA의 2020년 한해 지출 예산은 2억5천만달러(약 3천172억원)에 달했다. 미국 내 모든 총기 규제 옹호 단체를 합한 것보다 많다. NRA는 정치인 후원에 4백만 달러 정도를 쓰는 것으로 알려졌지만, 실제 로비 금액은 훨씬 광범위하다. 정치 활동 전반에 5천만 달러 이상을 쓰는 것으로 알려졌으며, 도널드 드럼프 대통령의 선거운동 기간에 3천만 달러를 썼다는 보도도 있다.
특히 공화당을 지지하는 NRA는 정치인들을 줄 세우면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미 의회 의원들의 총기 권리에 대한 우호도를 평가해 A~F로 등급을 매기는 것이다. 공화당의 전직 하원 의원은 지난 2013년 뉴욕타임즈에 "NRA에 가서 '제가 현직에 있는 동안 NRA에 반항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텍사스 비극에도 불구하고 NRA는 27~29일 텍사스주 휴스턴에서 보란듯이 연례 총회를 강행하며 세를 과시한다. 차기 대권을 노리는 것으로 알려진 트럼프 전 대통령도 참석한다.
② 수정 헌법 2조
미국의 수정헌법 2조도 총기 유지론자들에겐 이론적 근거가 되고 있다. 수정헌법 2조는 "잘 규율된 민병대는 자유로운 주의 안보에 필수적이므로, 무기를 소지하고 휴대할 수 있는 국민의 권리를 침해해선 안된다"고 명시하고 있다. 총기 유지론자들은 이를 근거로 규제 자체가 위헌이라고 주장한다.민주당은 서부 개척시대 때 만들어진 수정헌법 2조를 21세기에 똑같이 적용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헌법 정신 훼손'이라는 대의에 종종 밀리고 있다.
총을 자기방어의 수단 겸 자유주의의 상징으로 여기는 미국 내 정서도 한몫 한다. 2017년 여론조사 회사 퓨리서치센터 조사에 따르면 미 총기 소유자의 3분의 2가 "자기방어를 위해 총을 구매했다"고 밝혔다. 총기 난사로 인한 희생자가 많아질수록, 자위권 행사를 위해 총기를 보유하려는 사람 또한 많아진다는 것.
자유주의가 지배 이념으로 자리잡은 미국에서 정부 권력에 대한 견제 심리도 작동한다. 정부와 국민 사이의 상호 신뢰가 감소할수록 무기 소유 비율은 높아졌다는 전문 기관의 분석도 있다. 총기 소유 권리를 보장받음으로써 정부가 개인의 자유를 박탈하려는 시도를 막을 수 있다고 여긴다는 것이다.
③ 도시에 불리한 선거구와 필리버스터의 벽
대부분의 총기 규제 법안은 하원에서부터 가로막히곤 했다. 공화당이 하원을 장악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총기 소지자가 많은 시골 지역의 선거구는 도시의 선거구보다 숫자가 많다. 도시 지역에서 총기 규제를 찬성하는 정치인들이 다수라고 해도 숫자에서 밀리기 때문에 하원의 문턱을 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2016년 6월에는 민주당 의원들이 공화당 하원 지도부의 결정에 항의해 연좌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어렵게 하원을 통과했다고 해도 상원 필리버스터의 벽을 넘어야 한다.
미국 상원(100명)에서 합법적 의사진행 방해인 필리버스터를 피해가기 위해서는 60명 이상의 찬성이 필요하다.
그런데 60명의 벽을 넘기가 쉽지 않다. 지난 2013년에도 샌디훅 초등학교 총기 사건 이후에 여론이 고조되면서 신원조회 강화 법안이 상원에서 거의 통과될 것처럼 보였지만 NRA 로비 이후에 56명의 투표를 얻어, 필리버스터를 깨는데 단 4표가 모자랐었다.
현재 총기 구매시 신원조회를 강화하는 내용의 법안 2개가 하원을 겨우 통과했는데, 상원에 계류중이다. 민주당과 민주당 계열 무소속 의원은 현재 50명으로, 공화당의 10표가 더 필요해 사실상 통과가 힘들 것이라는 관측이 많다.
이번엔 다를까?
그렇다면 미국에서 총기 규제는 영원히 불가능한 것일까?코로나19 기간에 총기 사건이 폭증하면서 정치권도 겉으론 각성하고 있는 듯 하다. AP 통신에 따르면 미국 연방 상원은 27일(현지시간) 민주당과 공화당 양당 의원 10명으로 그룹을 구성해 총기 참사를 줄일 수 있는 법안 마련에 착수했다.
결국 여론의 흐름이 관건이 될 것으로 보인다. 미 정치전문매체 폴리티코와 컨설팅업체 모닝 컨설팅이 텍사스 참사 다음날인 지난 25일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신원조회 강화가 '매우 필요하다'는 응답은 73%, '어느 정도 필요하다'는 응답은 15%에 달했다.
하지만 총기 사건이 발생할 때는 규제 여론이 뜨거웠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흐지부지되는 것을 반복해 왔기에 더 지켜봐야 한다. 분명한 건 NRA와 공화당 총기 옹호 정치인들은 이 애도의 폭풍이 조용히 지나가길 기다린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