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끝작렬]고장난 미국, 천조국의 민낯

남북전쟁 같은 미국 낙태갈등, 그 논란의 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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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태를 보장한 판례를 뒤집겠다는 미국 연방 대법원의 내부 입장이 알려지면서 미국이 내전 같은 양상이다.

사흘째 전국에서 찬반 시위가 격렬하다. 남북전쟁에 버금가는 사회 갈등이라는 이야기까지 나온다.
 
이번 사태를 관찰하고 있자니 미국도 어쩔 수 없는 나라라는 생각이 떠나지 않는다.
 

사법 쿠데타

 
미국 연방대법원에 모여든 낙태권 찬반 시위대. 연합뉴스

우선 이번 사태는 일종의 사법 쿠데타다.
 
판결을 위해 사전 대법관들의 의견을 종합하는 과정에서 작성되는 의견서 초안(opinion draft)이 유출됐다. 의견서 초안은 특정 사건에 대한 다수 의견서로 최종 판결문의 근간이 되는 대법원의 공식 문서다. 이 초안이 외부에 유출된 예는 미국 사법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해당 의견서는 수정헌법(제14조)상의 사생활 보호 규정에 따라 24주가 안된 태아에 한해서는 낙태를 할 수 있다고 판결한 연방대법원의 '로 대(對) 웨이드'(1973년) 판결문을 뒤집는 내용을 담고 있다.
 
따라서 의견서 초안을 9명의 대법관들에게 회람하는 과정에 참여한 대법원 구성원 가운데 한 명이 초안을 통째로 언론에 유출한 것이다.
 
유출한 사람은 대법관 또는 각 대법관을 보좌하는 서기(clerk)가 유력하다. 또 그 유출 동기 역시 자명하다. 의견서가 대중에게 알려지면 여론전이 일 것이고, 그 경우 대법원의 판결문이 다시 뒤집힐 수도 있다고 봤을 것이다.
 
낙태 권리에 대한 미국의 여론이 우호적이라는 점을 십분 활용하겠다는 속셈이었을 것이다. (작년 퓨 리서치가 미국인들을 상대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59%가 낙태권에 찬성, 39%가 반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갤럽의 여론조사에서는 80%가 낙태권을 지지했다.)
 
그러나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이자, 정의와 양심의 상징인 대법원에 몸담고 있는 법률 종사자가 여론 공작을 생각해 냈다는 것은 섬뜩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누구 잘못인가

 
미국 대법원 앞 낙태권 보장 촉구 시위. 연합뉴스

사실 미국 연방대법원이 낙태권리를 불허하는 판결을 내놓을 것이라는 관측은 미국에서는 오래전부터 제기됐다. '로 대(對) 웨이드' 판결이 번복되는 것은 시간 문제였던 셈이다.
 
대법원의 인적 구성이 바뀐 때문이다.
 
연방 대법원은 보수와 진보의 비율이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 재임기간 때까지도 5대 4로 팽팽했다. 그러다 트럼프 말기 6대 3으로 급격히 보수화된다. 진보성향의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대법관이 트럼프 시절 사망한 때문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긴즈버그 대법관 자리에 극보수 성향의 에이미 코니 배럿 대법관을 지명했다.
 
미국 진보 진영은 대법원 보수화의 책임을 트럼프 전 대통령에 돌리지만, 보수주의자인 대통령이 보수 대법관을 지명하는 것을 탓하는 건 형평성에 어긋나는 일이다. 오히려 종신직인 대법관 자리에 노욕을 부린 긴즈버그 대법관에 책임을 돌리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긴즈버그 대법관은 2020년 9월 안타깝게 생을 마감하기까지 다섯 차례의 암 수술을 받았을 정도로 악화된 건강상태로 대법관직을 유지해왔다. 만약 자신의 건강 상태를 받아들이고 버락 오바마 대통령 시절 퇴임했더라면 지금의 낙태 정국은 쉽게 오지 않았을 확률이 높다.
 
그럼에도 보수화 된 대법원의 책임을 긴즈버그 대법관에 돌리는 미국 언론은 보질 못했다. 긴즈버그는 진보의 성역이기 때문이다.
 

정치권의 속내

 
이번 사태로 미국 정치권의 대결은 더 심화되고 있다. 조 바이든 대통령의 향후 국정 동력 유지의 분기점이 될 11월 중간선거를 앞두고 터진 메가톤급 이슈를 놓칠리 없다.
 
공화당은 대법원 판결로 자명해진 낙태 불허 이슈를 덮기 위해 의견서 유출을 쟁점화하고 있다. '리크(유출) 게이트'로 프레임을 짰다.
 
낙태 이슈는 공화당에 절대적으로 불리하다. 낙태권 불허가 올 여름에 대법원 판결문으로 공식적으로 나오면 여성들의 표결집력이 폭발할 수 있다. 이 때문에 공화당은 이번 사태를 우리식의 국기문란 프레임으로 돌리려하고 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연합뉴스
반대로 바이든 대통령과 민주당은 호재를 만났다. 40년만의 초 인플레이션 등 경제 실정으로 올 가을 선거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라 낙태 국면을 최대한 활용하려하고 있다.
 
그 속내가 바이든 대통령의 3일 발언에 고스란히 묻어난다.
 
"만약 대법원이 기존 판결을 뒤집는다면, 선출직 공무원들이 낙태권을 보호하도록 11월에 표를 던져 달라."
 

누가 피해보나

 
정치권이 제사보다는 잿밥에 더 관심을 보이는 동안 낙태 선택권 축소로 인한 피해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낙태 보장을 없애는 대법원 판결이 나온다면 20여개 주(州)는 즉시 낙태를 금지 또는 제한하는 법을 시행하게 된다. 이 경우 낙태를 원하는 여성들은 암암리에 시술을 하거나, 아니면 낙태가 가능한 주로 원정 시술을 갈 수 밖에 없다. 위험하고 비용도 많이 든다는 뜻이다.
 
미국 연방대법원 앞에서 낙태 찬성 시위 중인 모녀. 연합뉴스
미국에서는 45세 이하 여성 가운데 4명중 1명꼴로 낙태 경험이 있을 정도로 낙태 시술이 빈번하게 이뤄지고 있다.
 
산모의 사망률 역시 다른 선진국들에 비해 높은 편이다.
 
특히 흑인 여성들이 더욱 취약한 것으로 나타났다. 2020년 사망한 산모 가운데 흑인이 1/3에 이를 정도로 많았다.
 
대법원의 태클로 낙태 시술에 더 많은 비용이 드는 상황이 된다면 저소득층 여성들은 과거처럼 다시 위험한 시술에 몸을 맡겨야할 수도 있다.
 
철재 옷걸이를 이용하거나 독약 같은 민간요법으로 낙태를 시도하는 암울했던 시대로 회귀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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