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기의 사전적 정의는 계약이나 약속 따위를 일방적으로 깨뜨려 무효로 만드는 것이다. 서로 약속한 합의가 깨질 때 주로 사용되는 표현이다. 그런데 북한의 핵‧미사일 모라토리엄은 남북이나 북미, 또는 남북미 간에 합의된 약속이 아니다.
북한은 '한반도의 봄'이 시작되던 2018년 4월 20일 노동당 전원회의를 통해 "핵시험과 대륙간탄도로켓 시험발사를 중지할 것"이라고 일방적으로 선언했다. 물론 이 역시 대외적 약속이긴 하나 구속력 차원에서 볼 때 합의나 계약과는 다르다.
따라서 이런 경우에는 모라토리엄 철회가 더 정확한 의미를 담게 된다. 철회의 사전적 정의는 이미 제출했던 것이나 주장했던 것 따위를 도로 거두어들이거나 취소하는 것이다.
일방적 선언을 거둬들인 측면에서 '철회'가 합당…정부는 '파기'로 규정
만약 현 상황을 북한의 모라토리엄 파기로 인식한다면 대북 불신과 혐오는 도저히 회복 불가능한 수준으로 악화될 수 있다. 이런 중대한 합의조차 일방 파기하는 게 북한 김정은 체제의 본질이라면 대화 자체가 무망하다고 봐야 하기 때문이다.
이 경우, 더 강한 제재‧압박 외에는 선택지가 없다는 점에서 위험한 논리적 귀결이 된다. 문재인 정부로선 북한에 대한 최소한의 신뢰를 바탕으로 추진해온 한반도평화프로세스에 대한 자기부정일 수도 있다.
반면 북한의 모라토리엄 철회가 객관적 현실에 더 부합하는 설명이라면 한반도 정세의 막다른 길은 일단 피할 수 있다. 모라토리엄이 깨진 것이 100% 북한의 책임만은 아니라는 상황 정리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北 '주동적 신뢰구축' 조치에도 美 계속 외면…'하노이 노딜' 후 배신감 증폭
북한은 새로운 북미관계 수립을 위해 '선제적 주동적 신뢰구축 조치'를 취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합당한 보상은커녕 오히려 제재 강도만 높이는 것에 배신감을 표출해왔다. 이는 최고 지도자의 위신과도 관련된 문제다.
한때나마 적극적인 대북 관여에 나섰던 미국 트럼프 행정부는 하노이 노딜 이후에는 "서두르지 않겠다"(No hurry)며 현상유지 전략으로 돌아섰다. 이어 집권한 바이든 행정부는 말로는 '조건 없는 대화'를 내걸었지만 아무런 유인책도 제시하지 않은 채 사실상 '전략적 인내'로 회귀했다.
임을출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는 "북한으로선 미국이 더 이상 변화할 여지가 안 보이는 상황에서 우리만 모라토리엄을 유지할 이유가 있느냐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런 현실을 객관적으로 보지 않으면 해법을 찾을 수 없다는 점에서 모라토리엄 '철회'로 보는 것에 동의한다"고 했다.
로이터 등 외신도 '철회'로 인식…美 귀책사유도 거론돼야 상황에 숨통
비교적 객관적인 외국 언론들도 모라토리엄 '파기'(breach)가 아닌 '철회'나 '종료'로 인식하고 있다. 일례로 로이터 통신은 지난 24일 북한이 '스스로 부여한 모라토리엄을 극적으로 종료'(a dramatic end to a self-imposed moratorium)하는 ICBM 발사를 했다고 보도했다.미국 이익을 대변하는 안보매체 내셔널인터레스트도 같은 날 보도에서 비슷한 표현(a clear end to the moratorium)을 사용했다.
결론적으로 앞서 지적했듯이, 모라토리엄 '철회'로 상황을 재인식한다면 북한 뿐 아니라 미국 측 귀책사유도 거론될 수밖에 없다. 이는 북한을 막다른 길로 모는 파국적 상황 전개에서 한숨 돌리고, 나아가 대화 재개를 모색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한다.
조셉 디트라니 전 미국 국무부 대북특사는 최근 언론 인터뷰에서 "미국과 유엔이 북한 모라토리엄과 맞바꿀 수 있는 로드맵을 제시해야 하고 모라토리엄에 상응한 제재완화도 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북한과 마주앉지 않으면 긴장은 더 고조될 것이고, 의사소통과 판단에 착오가 발생해 우발적 충돌이 발생할 가능성도 커진다"고 경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