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3세대 이후부터 현재까지의 팬덤은 앞서 서술한 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돈 쓸 곳'이 넘쳐난다. 음원 및 음반 차트 순위를 올리기 위해 앨범을 사고 음원 스트리밍을 하는 것은 기본이고, 각종 음악방송이나 시상식에 반영되는 유료 투표에도 망설임 없이 지갑을 연다. '영통팬싸'(영상통화 팬 사인회)를 가고자 한다면 앨범 구매에 들이는 돈은 더 늘어날 것이다.
그뿐인가. 앨범 활동 연계 굿즈, 시즌 그리팅, 생일맞이 기념품 등 다양한 형태와 종류를 갖춘 굿즈가 쉴 새 없이 쏟아진다. 요즘은 아이돌이 직접 기획 단계부터 제작 전반에 참여했다는 것을 강조한 상품이 특히 인기다. '내 돌'의 멋짐과 예쁨을 한껏 강조한 포토카드를 준다는 명목으로 일정 금액 이상의 구매를 유도하는 경우는 아주 흔히 볼 수 있는 예다.
페미니스트 시각에서 분석하는 '아이돌학'(學)이라는 뜻인 '페미돌로지'(2022·빨간소금)는 13명의 페미니스트의 연구를 담아낸 책이다. 저마다 다른 구체적인 주제를 가지고 펼쳐낸 글이 모인 가운데, 가장 자주, 비중 있게 다뤄지는 것은 바로 '팬덤'이다. 최근 들어 '소비자 정체성'이 점점 심화하는 현상, 그것이 아이돌과의 관계와 산업 전반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가 여러 차례 언급된다.
CBS노컷뉴스는 '페미돌로지'의 기획자인 류진희·허윤 교수를 최근 서면 인터뷰했다. 더 굳건해지는 팬덤의 소비자 정체성은 물론, 팬덤의 이 같은 '무리한 소비'가 지탱하는 아이돌 산업 구조 탓에 노동과 의무가 가중되는 아이돌의 현재에 관해 질문했다.
아이돌 산업의 핵심은 '친밀성'을 파는 것이다. 이전에도 아이돌 상품에 "정당성과 진정성을 부여하는 작업은 일관되게 시도"(178쪽)되었으나, 지금은 훨씬 더 고도화된 상징성을 가진다. "더욱 내면화되고 고도화된 방식의 진정성과 친밀성을 상호 부여할 때라야 팬덤과 시장에서 가치를 갖는다"(같은 쪽)는 것을 깨달은 기획사는 다양한 상품을 대량 생산·판매하는 데 여념이 없다. 책에서는 '2차 창작' 등 팬들 스스로 해온 활동이 '비공식'으로 규정돼 부차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지만, 기획사 판매 상품은 '공식'이란 이름 아래 더 우위를 점하게 됐다는 최근의 특성을 기술하고 있다.
허윤 교수는 "기획사의 수익 모델이 다양화되는 방식이라고 보아야 할 듯하다"라며 "오히려 팬덤이 적극적으로 자신들의 의견을 개진하는 방식은 예전보다 훨씬 정교해지고 다양해졌다. 90년대, 2000년대까지만 해도 기획사가 절대적 갑이고, 팬덤은 거기에 무료로 노동력(팬클럽 회장 등을 이용한 조직 관리 등)을 제공하는 존재였으니까. 그런데 지금은 팬클럽 운영과 관리, 굿즈 생산 등을 모두 회사가 '공식적으로' 하려고 하고, 이는 사실은 수익을 창출하는 방식이라고 볼 수 있을 듯하다"라고 바라봤다.
이어 "저희 책에서 이야기하는 것으로는 친밀성을 파는 것이다. 팬마다 소비 방식도 다른데, 비공굿(비공식 상품)을 안 사는 팬도 있지만 사는 팬도 있다. 기획사가 다양한 방식으로 친밀성을 상품화하고 있고 이 과정에서 오히려 아이돌과 팬의 관계는 계량화되는 방식으로 바뀌고 있지 않나 싶다. 이전의 관계가 '인격적인 관계'라는 것을 은연중에 내포했다면, 이제는 버블 몇 번, 브이앱 몇 번 이런 식으로 그 관계를 수치화해서 판매하기 때문에, 장기적으로는 아이돌 산업의 탈(脫)신비화에 기능하지 않을까"라고 밝혔다.
류 교수가 언급한 것처럼 팬과 아이돌의 관계에서 '수치'가 중요해지는 것은 일반적인 흐름이다. 팬들의 '과도한 소비'와 '열광적 지지'를 바탕으로 돌아가는 산업의 특성상, 팬들은 돈과 시간을 들인 것에 상응하는 '보상'을 원하고 이는 결국 아이돌의 '더 많은 의무와 노동'으로 귀결된다. "이만큼 돈을 썼으니, 마땅히 이 정도는 해야 한다"는 식의 '소비자'와 '상품' 관계가 강화되는 흐름이다.
물론 팬들도 '내 가수'를 위해 매우 헌신적인 태도를 보인다. '열렬한 구매'로 아이돌의 수익 창출과 명예 형성에 기여하고, 반복 스트리밍이나 영업 글 작성 등 시간과 감정을 소모하는 무임 노동을 자처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장면이다. 문제는 '잘돼야 한다'는 공통의 목표를 향해 각자 최선을 다하는 팬과 아이돌의 '동지적 관계'에 균열이 생길 때 발생한다. 팬덤은 이때 "아이돌과 팬덤의 관계가 애정에 기반한 호혜적 관계가 아닌 그저 금전을 매개로 한 조건적 관계에 불과했음을 드러냈다고 생각"(240쪽)하게 되고, 스타의 규범 위반을 일종의 기만이나 배신으로까지 여기는 것이다.
류 교수는 "팬덤은 기본적으로 스타를 매개로 하는 팬들 간의 관계에 근거한다. 이것이 긍정적인 방향으로 발현될 때는 찬탄을 받기도 하지만, 때로는 부정적인 쪽으로 발산되기도 한다"라며 "협력적 관계가 형성되기도 하지만, 아주 찰나의 순간에 적대의 선이 그어지기도 합니다. 소위 탈덕의 과정을 둘러싼 피아(彼我)의 구별은 전쟁을 방불케 하기도 한다"라고 운을 뗐다.
그러면서 "이제까지 팬덤은 그 결속적 수행성으로 긍정적인 의미로 해석돼 왔지만, 실제로는 배제 논리에 의해 경계를 구획하기도 한다. '페미돌로지'의 몇몇 글들은 이 같은 부정성을 소비자적 정체성과 연결하여 구체적인 사례로 분석하고 있다. 아이돌 산업에 참여해온 행위자로서의 팬덤을 비판적으로 재구성하려는 시도가 일어나길 기대하고 있다"라고 부연했다.
여전히 고민해야 할 문제는 산적해 있으나, 아이돌 문화를 향유하는 팬덤 내에서도 여러 가지 자정 및 개선 노력을 해 왔다. 성적 대상화나 유아화 반대 목소리가 나오는가 하면, 아이돌의 '인권'에 대한 민감도도 점차 높아지고 있다. 최근 '아이돌 판'에서 발견한 긍정적인 가능성이나 흥미로운 경향이 있는지 물었다.
그러면서 "지구 곳곳에서 젊은 세대들이 K팝을 매개로 자신들의 존재감을 드러내거나 스스로의 주장을 광장에서 펼쳐낼 때, 그에 대한 응원 혹은 지지를 무람없이 보낼 수 있는 것, 그러한 조우가 어떤 한계를 넘어 다른 가능성을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라고 덧붙였다.
마지막 질문은 가벼운 내용이었다. '페미돌로지' 마감을 하며 들었던 아이돌 노래가 있는지를 물었다. 류 교수는 "글 쓸 때는 신경 쓰여서 듣지 못했다"라며 "아이돌 노래는 파워워킹으로 산책할 때 주로 듣는다. 그룹 및 곡은 비밀"이라고 답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