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없어 공부 못 한 게 평생 한이었소" 포장마차 할머니의 선행

가난으로 힘겨운 삶 버텨내다 "의미 없이 죽을 순 없었다"

연합뉴스
"돈이 없어 공부를 못 한 것이 평생 한이었소."


어려운 형편의 학생들을 도와달라며 은행 통장에 남아있는 3천만원 전액을 장학기금으로 기부한 김순덕(81) 할머니.

누군가에겐 크지 않은 금액일 수 있지만, 평생을 가난 속에서 살아온 김 할머니에겐 전 재산과도 같은 돈이었다.

그가 선뜻 장학금 기부를 결심하게 된 건 찢어지게 가난했던 어린 시절이 못내 아쉬워서다.

1950년 초등학교 3학년이었던 김 할머니는 6·25 한국전쟁을 겪으며 더는 학교에 발을 들이지 못했다.

빈민촌에 살던 부모님을 도와 닥치는 대로 일을 해야 했던 탓에 차마 공부를 더 하고 싶다는 말조차 꺼내지 못했다.

"그땐 교복을 입고 학교 가는 학생들을 보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습디다."

25살에 기술공인 남편을 만나 결혼했지만, 이후에도 20년 가까이 계속된 가난은 두 사람을 이혼으로 내몰았다.

자녀 넷을 둔 김 할머니는 당장 먹고살 걱정에 큰딸 학교 납부금으로 모아둔 2만원으로 계림동에서 포장마차를 시작했다.

처음엔 학생들과 직장인들이 오가며 순대와 어묵 같은 분식을 먹고 가는 곳이었다.

교복 입은 학생들이 찾아오면 부러움 반, 애틋함 반으로 주문한 양보다 듬뿍 담아주기 일쑤였다.
그러나 장사는 생각만큼 잘되지 않았다.

보다 못한 단골손님 하나가 "이것도 간이술집"이라며 술과 안주를 팔고 늦은 시간까지 문을 열어보라고 충고했다.

생각해보니 술을 찾는 성인 손님들이 자주 찾아오긴 했으나 술을 팔지 않는다는 말에 발걸음을 돌렸던 게 부지기수였다.

그때부터 술과 안주를 팔기 시작한 김 할머니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하루도 빠지지 않고 오전 5시까지 꼬박 12시간씩 장사를 했다.

그제야 조금씩 돈이 모이기 시작했고, 몇년 후엔 인근의 조그마한 가게를 얻어 장사를 이어갔다.
그렇게 억척같이 번 돈으로 네 자녀를 남부럽지 않게 키워내면서도 틈틈이 봉사와 기부를 이어갔다.

"선행을 베풀면 자신에게 돌아온다"고 믿는다는 김 할머니는 자기 일이 잘 풀리게 된 것도 모두 나눔 덕분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인지 장사를 그만둔 뒤에도 노인 일자리 사업에 참여해 받은 돈은 고스란히 모아놨다가 주변 어려운 사람이나 어린이재단 등을 후원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김 할머니는 지난해 부쩍 건강이 좋지 않다는 걸 느꼈다.

세상을 떠날 수도 있겠다는 불길한 느낌까지 들자 정신없이 흘러온 자신의 삶을 되돌아봤다.

가장 후회되는 순간은 학교에 다니지 못했던 어린 시절.

어린 학생들이 자신처럼 가난 때문에 학업을 포기하지 않도록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 싶었다.

그는 곧장 전 재산 3천만원이 든 예금통장을 들고 서구 장학회를 찾아가 전액을 내놓았다.

김 할머니는 "이 세상에 나와서 아무런 의미 없이 떠나면 죽어서도 눈을 못 감을 것 같았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이어 "장학금을 딱 내고 나니 마음이 그렇게 흐뭇할 수가 없었다"며 "받는 사람보다 내가 더 오히려 행복한 마음일 것"이라고 말했다.

전 재산을 내놓은 김 할머니는 지금처럼 큰돈을 다시 기부할 순 없겠지만 건강이 허락하는 대로 봉사하며 살 것이라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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