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나라는 에너지와 식량, 광물 등 원자재의 주요 생산국입니다. 원자재 대부분을 수입에 의존하는 우리 산업계가 우크라이나 사태에 주목하는 이유입니다. 산업을 읽는 인더독 시리즈, 이번에는 반도체 생산에 필수적인 희귀가스 네온을 중심으로 글로벌 공급망의 위기를 살펴보겠습니다.
'전함 포템킨' 명장면으로 남은 남부 항구도시 오데사는 지금
우크라이나 남부 흑해 연안의 오데사는 유서 깊은 항구도시입니다. 영화 역사상 가장 위대한 걸작 중 하나로 꼽히는 '전함 포템킨'의 실제 사건인 '포템킨 사건'이 1905년 6월 일어난 곳이기도 합니다.
포템킨함은 당시 러시아 최대 항구도시인 오데사에서 벌어진 시민 봉기를 진압하기 위해 출항했습니다. 불합리한 처우에 격분한 수병들은 반란을 일으켜 전함을 장악했고, 오데사에 도착해서는 오히려 시위를 지원했습니다.
결국 반란은 진압됐지만 이 사건은 러시아 제국 붕괴의 시초를 알린 사건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러시아 제국군대의 오데사 시민 학살은 영화 '전함 포템킨'에서 당시로선 혁신적인 '몽타주' 기법을 통해 결정적인 장면으로 그려졌습니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지난 8일(현지시간) "항구에서 도심으로 올라가는 '오데사의 계단'에는 아직도 당시 희생된 시민들의 핏자국이 보인다"면서 러시아군의 침공에 대비하는 남부도시 오데사의 풍경을 전했습니다.
우크라이나, 반도체 공정 필수적인 네온 글로벌 생산량의 70% 차지
1841년에 지어진, 오데사의 상징이기도 한 이 석조 계단에서 불과 1km 떨어진 도심에는 '아이스블릭(iceblick)'이라는 회사가 있습니다. 희귀가스인 네온(Ne)의 전 세계 공급량의 65%를 차지한다고 알려진 업체입니다.
우리 반도체 기업도 반도체 공정에 필수적인 네온을 지난해 우크라이나에서 전체의 23%를 수입했습니다. 그나마 2020년 52.5%에서 점유율이 절반 이하로 떨어졌지만 러시아(5.3%)까지 합치면 여전히 30%에 달해 동유럽 의존도가 높은 편입니다.
우크라이나는 옛 소련 시기 소련에서 생산한 네온 물량의 대부분을 보관하고, 흑해를 통해 수출하는 기지 역할을 했습니다. 이런 인프라를 기반으로 우크라이나 독립 이후에도 항구도시인 오데사와 마리우폴에 위치한 업체들이 네온 등 희귀가스의 글로벌 공급을 담당지게 된 겁니다.
밤거리 수놓는 '네온사인'으로 친숙…순도 99.9999%로 정제해 활용
네온은 대기 중에 질소, 산소, 아르곤, 이산화탄소에 이어 5번째로 많은 원소입니다. 천재 발명가 니콜라 테슬라에 의해 1893년 붉은 빛을 띄는 기체라는 점이 처음 알려졌고, 5년 뒤 그리스어로 '새롭다(neos)'는 의미에서 유래된 이름 네온을 갖게 됐습니다.
네온은 제철소에 산소와 질소를 공급하는 대형 극저온 공기분리 장치에서 포집됩니다. 산소는 제철소 용광로의 연소를 위해 쓰이고, 또 질소는 용광로가 잠시 쉴 때 내부를 채우는 용도로 사용됩니다.
순수 산소와 순수 질소를 뽑아낸 뒤 남은, 업계에서 '불순 질소'라고 부르는 이 나머지 공기에서 부피 기준으로 대기의 0.001818%에 불과한 네온을 모아내는 겁니다. 다른 희귀가스인 헬륨(He)과 크립톤(Kr) 등도 비슷한 공정을 거쳐 포집됩니다.
순도 99.9999%의 네온은 의료용은 물론, 반도체 및 디스플레이용 노광장비 등 산업용으로 두루 쓰이는 엑시머레이저의 주재료입니다. 네온, 불소, 아르곤 등 특수 가스를 혼합해 엑시머레이저를 만드는데, 네온이 95% 이상을 차지합니다.
네온, 한국 주력인 메모리반도체 제조시 핵심 소재로 쓰여
설계한 회로패턴을 실리콘 웨이퍼에 도포하고 빛을 비춤으로써 사진을 찍는 것처럼 패턴을 새기는 리소그래피, 즉 노광공정은 반도체 제조에서 가장 중요한 공정으로 꼽힙니다. 네온이 들어간 엑시머레이저를 활용하는 노광공정이 DUV(심자외선)입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장악한 메모리반도체 부문도 당연히 DUV의 비중이 절대적입니다. 두 회사는 70% 이상의 점유율을 보이는 D램 제조에 EUV 라인을 선제적으로 일부 도입하긴 했지만 전체 생산량의 90% 이상은 여전히 DUV 공정입니다.
특히 낸드플래시의 경우 전량을 DUV 공정으로 생산합니다. 미국의 마이크론까지 합쳐 3강 체제가 굳어진 D램과 달리 낸드플래시 시장은 부동의 1위 삼성전자(약 33%)와 SK하이닉스(약 19%)를 비롯해 일본, 미국, 중국 업체가 치열하게 경쟁하는 구도입니다.
러시아 침공에 주목한 이유…하반기엔 국내산으로 16% 충당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앞두고 우리 반도체 업계는 물론, 정부까지 대응책 마련에 나선 것은 바로 네온과 크립톤 등 희귀가스 수급 문제 때문입니다. 네온은 지난 2014년 러시아의 크름반도 합병 이후 가격이 10배 이상 치솟은 전력이 있습니다.
업계에서는 글로벌 공급망 차질 등으로 계기로 공급선 다변화를 추진해온 만큼 당장은 큰 영향이 없을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이석희 SK하이닉스 사장은 지난달 기자들과 만나 "(물량을) 많이 확보해 놨다. 나름대로 준비하고 있어서 너무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전량 수입에 의존하던 네온의 국산화에도 일부 성과가 있습니다. 반도체 제조용 특수가스 전문 소재기업인 TEMC는 포스코와 협력해 올해 초 네온의 국산화 설비·기술 개발에 성공했습니다. 하반기부터 국내 수요의 16%가량을 충당할 수 있게 됩니다.
무디스 "러시아 침공, 세계 공급망 최대 악재로 부상"
문제는 러시아의 진군이 우크라이나의 반격으로 당초 예상보다 더디고, 사태가 장기전으로 치닫을 조짐이 보인다는 점입니다. 서방의 강력한 제재에 러시아가 맞불을 놓으면서 국제 에너지 및 원자재 수급 차질로 세계 경제 전반에 부정적 영향이 드리워지고 있습니다.
국제신용평가사 무디스는 최근 보고서에서 "글로벌 공급망이 직면한 최대 리스크가 팬데믹(전염병의 세계적 유행)에서 러시아-우크라 군사분쟁과 이로 인해 초래된 경제적 불확실성으로 바뀌었다"고 말했습니다.
무디스는 "수개월 안에 합의가 도출되지 않는다면 한국, 대만, 일본, 중국 반도체업체들이 타격을 입어 가격 상승과 공급 지연이 생길 수밖에 없다"며 코로나19 대유행 이후 이어진 글로벌 반도체 공급 부족 현상이 더욱 심해질 가능성이 있다고 경고했습니다.
"반도체 부족에 따른 도미노 효과는 자동차와 전자제품, 스마트폰 등을 생산하는 기업에 비용 증가와 생산 침체 등 리스크로 작용할 것"이라고 무디스는 우울한 전망을 덧붙였습니다.
포화가 잦아들기를, 더 이상 다치거나 숨지는 사람이 없기만을 바랍니다. No Wa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