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대의 최고 지성으로 꼽히는 이어령 이화여자대학교 명예석좌교수가 암 투병 끝에 26일 별세했다. 향년 88세. 호적상 1934년 충남 아산에서 태어난 고인은 문학평론가, 언론인, 교수 등으로 활동하면서 시대의 한계 너머를 가리키는 지성의 나침반 역할을 해 왔다.
고인은 지난 1956년 그 유명한 평론 '우상의 파괴'를 통해 문제적 인물로서 화려한 등장을 알렸다. 한동안 문단에서는 "'우상의 파괴' 읽었어?"라는 말이 인사말이었다니 그 충격파를 가늠할 수 있다. 기성 문단을 향한 이 통렬한 비판은 당대 엄혹한 세상을 밝힐 새로운 시대 정신을 열어젖히기 위한 선결 과제였다.
이어령은 그 고난의 길에서 선봉을 자처했고, 평생의 삶으로 이를 실천하고 열매를 맺으면서 그 가치를 증명해냈다. 기성 권력과의 논쟁과 대립을 두려워하지 않은 고인을 기점으로 문학평론이 비로소 '문학'으로 격상됐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도 이러한 삶의 태도에서 찾을 수 있다.
지난 2013년 팔순 잔치를 겸한 신간 '생명이 자본이다' 출간기념회는 이러한 고인의 철학을 엿볼 수 있는 단적인 예다. 이 행사에서는 화환, 축의금, 얼음조각과 같은 겉치레를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의 업적을 소개한 영상이 상영된 직후 인사말에서 "제가 즐거워서 한 일이 마치 대단한 일인 것처럼 소개돼 송구스럽고 감사하기만 하다"며 "오늘 와 주신 분들이 모두 제 동행자들이라 귀빈과 말석의 구분도 없애려고 내빈 소개와 축사도 없앴다"고 설명했다.
"진정한 이름을 하나씩 지어주는 모험이 나의 문학"
지난 1990년 출범한 문화부 초대 장관을 지내면서 국립국어연구원, 한국예술종합학교 등을 설립한 것도 고인의 업적으로 회자된다. 이는 '문화예술은 생활 속에서 호흡하는 문화여야 한다'는 그의 철학을 녹여낸, 문화예술인 이어령의 문화적 정책 접근에 따른 결실이었다.
무엇보다 서울 평창동에 세운 영인문학관에서 삶의 마지막까지 글쓰기를 멈추지 않았다는 사실은 고인의 실천적 삶을 오롯이 드러내는 일화다. 영인문학관은 고인과 부인인 강인숙 건국대 명예교수 이름을 딴 것이다.
고인의 커다란 발자취는 실제 태어난 해(1933년)와 호적상 그것(1934년)이 다른 점을 설명함으로써 삶의 태도를 길어 올린 아래 글에서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악동'을 자처했던 '지성의 나침반'은 지금도 여전히 시대정신을 관통할 수 있는 지름길을 간곡한 떨림으로 가리키고 있는 셈이다.
'나의 문학은 이렇게 실제 나이가 호적과 다르다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내 위조된 출생 월일은 상석에 모셔놓은 면사무소, 학교, 은행과 병영, 높은 담으로 둘러쳐져 있는 법원, 입법자들이 모이는 회의장, 여기에서 살아남은 작은 움막집이 나의 문학이다. 이 공공 기물에 낙서하는 것이 나의 문학이다. 공문서를 소각하는 이 범법 행위 그래서 나와 나의 친구들이 결코 출석부 같은 것으로 호명되지 않는 책상에 앉기 위해서 진정한 이름을 하나씩 지어주는 모험이 나의 문학인 것이다. 모든 서류에 잘못 찍힌 나의 탄생을 바로잡기 위해서 나에게는 탯줄의 언어가 필요했던 것이다.' - 이어령 '이어령 자전 에세이'(문학사상사, 1994)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