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극과 비극으로 뒤섞인 인생에서 가장 높은 곳과 가장 낮은 곳을 오가는 무대 위 주인공의 삶을 레오 카락스 감독이 실험적으로 그려냈다. 그의 첫 영어 영화이자 첫 뮤지컬 영화 '아네트'는 삶과 이야기, 노래와 영상이 교차하며 만들어내는 영화적 체험을 선사한다.
예술가들의 도시 LA, 관객들이 사랑하는 최고의 오페라 가수 안 데프라스누(마리옹 꼬띠아르)와 매회 매진을 기록하던 스탠드업 코미디언 헨리 맥헨리(아담 드라이버)는 첫눈에 서로에게 이끌린다. 사랑에 빠진 두 사람은 결혼하고, 딸 아네트를 낳는다.
함께 인생을 노래하는 두 사람에게 무대는 계속되지만, 그곳엔 빛과 어둠이 함께한다. 무대 위에서 늘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하던 안은 현실에서 사랑을 꿈꿨지만, 비극적 죽음의 대상이 된다. 무대 위에서 신랄한 유머를 펼치며 정상에 섰던 헨리는 스스로 나락으로 떨어진다.
인생을 희곡에 비유하는 말들이 있다. 영화 속 안과 헨리의 삶도 마치 연극처럼, 혹은 그들의 오페라와 코미디처럼 무대 위에 펼쳐진다. 실제로 인생에는 희극과 비극이 어지러이 뒤섞여 있어서 어디부터가 희극이고 어디까지가 비극인지 알기 어렵듯이, '아네트' 역시 희극과 비극이 공존한다.
늘 정상에 서 있을 것만 같던 헨리의 삶은 결혼 이후에도 최고의 자리에 있는 안과 달리 점차 밑을 향해 추락한다. 그 과정에서 헨리는 스스로를 파괴해 나가고, 그의 내면을 가득 채운 폭력성이 밖으로도 삐져나와 안과 아네트를 향한다. 결국 헨리는 자신은 물론 자신의 삶을 이루는 모든 것을 파멸로 이끄는 비극으로 달려간다. 이러한 헨리의 비극적 서사는 익숙한 듯하지만, 이를 풀어내는 감독의 도전만큼은 새롭다.
'아네트'에는 실험적이면서도 독창적인 감독의 색깔 역시 다양하게 존재한다. 영화 오프닝에는 레오 카락스 감독 본인과 그의 딸 나타샤가 등장하는데, 마치 레오 카락스 감독이 스크린 안에 위치한 나타샤와 스크린 밖에 위치한 관객들에게 '아네트'라는 현실에 발붙인 환상 동화를 보여주는 느낌을 자아낸다.
감독의 재밌는 실험 중 하나는 아기 아네트를 실제 사람이 아닌 꼭두각시 인형으로 등장시킨다는 점이다. 인형 아네트의 등장과 함께 영화 안에는 인형극이라는 또 다른 형태의 무대가 생겨나는데, 극 중 내용을 고려한다면 아이가 직접 아네트를 연기하기 어렵기에 할 수밖에 없었던 선택으로도 보인다.
동시에 인형인 아기 아네트가 영화 엔딩에 이르러서야 진짜 사람의 모습으로 헨리와 관객들의 눈앞에 드러난다. 어쩌면 나쁜 아빠로 전락한 헨리가 아네트를 도구가 아닌 진짜 자신의 딸로, 하나의 존재로서 인지하게 된 순간 아네트가 꼭두각시 인형의 모습을 벗고 사람의 모습으로 등장한 것처럼 보인다.
사랑했기에 나락으로 떨어졌던 헨리를 어두운 밑바닥에서부터 끌어올릴 수 있는 건 결국 아네트이고, 그런 아네트의 사랑을 발견한 순간 헨리는 다시금 좋은 아빠로 설 기회를 얻은 것이다.
뮤지컬 영화인 만큼 배우들이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 자주 나오는데, 현장에서 배우들이 직접 노래하는 것을 원했던 레오 카락스 감독의 주문 덕분에 뮤지컬 신에서는 보다 현장감이 넘친다.
다양한 실험적 구성과 특유의 미장센으로 인해 영화는 어찌 보면 기이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그 안에 담긴 인생이라는 희곡의 전개, 끊임없이 새로움과 낯선 것에 도전하는 감독의 열정 그리고 스팍스의 음악이 관객들 눈과 귀를 스크린에 묶어 둔다.
이미 '라 비앙 로즈' 등을 통해 연기력을 입증한 마리옹 꼬띠아르는 이번에도 믿음직하게 안을 그려냈다. 여기에 아담 드라이버는 무대 위와 무대 아래, 정상과 추락, 희극과 비극의 큰 진폭의 끝과 끝, 그리고 그사이를 유영하며 엄청난 에너지를 선사한다.
141분 상영, 10월 27일 개봉, 15세 관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