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자서전에 직접 쓴 것처럼 이재명은 그야말로 밑바닥 출신이다. 그러나 주어진 상황에 도전했고, 싸움을 주저하지 않았다. 이번에 집권여당 대선후보로 낙점될 수 있던 바탕에는 그렇게 길러진 특유의 승부욕, 그리고 투지가 있었다.
'반항끼' 탓에 유독 많이 맞았던 소년공
소년 이재명은 1964년 경북 안동 깊은 산골에서 화전농의 5남 4녀 중 일곱째로 태어났다. 누나 둘이 먼저 세상을 떠난 뒤에는 다섯째가 됐다.
'제2의 고향' 경기도 성남으로 이주한 건 초등학교 졸업 직후. 느닷없이 가출했던 부친이 터를 잡아놨다며 이끌었지만, 실상은 단칸방 셋방살이였다. '도시 빈민' 질곡의 서막이다.
남들이 중·고등학교 다닐 때는 공장을 전전했다. 군복 입은 관리자들이 각목으로 속칭 '빳다'를 쳤는데 특유의 '반항끼' 탓에 유독 더 많이 맞았다고 한다. 고참들 강압에 못 이겨 동료 공원과 억지 권투 시합을 벌이기도 했다.
동력 벨트에 세 손가락이 휘감겨 엉겨 붙고, 프레스에 눌린 손목 관절이 으스러진 것도 이 무렵이다. 때문에 한쪽 팔이 쭉 펴지지 않게 됐으며 장애인 6급 판정을 받아 훗날 군대에도 갈 수 없었다.
살길을 제대로 찾아보겠다고 마음먹은 건 공교롭게도 2차례 자살 기도가 실패한 뒤였다. '독하게' 공부해서 검정고시로 중앙대 법학과에 합격했다. 대학에서는 운동권에 들어가지 않았다. 장학금 없이는 학교 다니기 어려운 처지였다는 게 지금의 변이다.
"어릴 때 그런 거 많았죠. 학력 콤플렉스 이런 거. 장애인 콤플렉스 그런 게 있을 수밖에 없었죠. 참 얻은 것도 많은데 잃은 것도 많죠. 팔도 잃었고. 물론 다 잃은 건 아니지만 코도 잃고 난청도 있어요. … 지금은 자산이기도 하죠(CBS노컷뉴스 인터뷰 중)"
친문계와 오랜 갈등…문자폭탄도 집중
1994년부터는 '성남시민모임'이라는, 지금은 성남참여연대로 이름을 바꾼 단체에서 시민운동가로 활동했다. '파크뷰 특혜 분양 사건'을 파헤칠 때 특히 주목을 받았다. 개발업자로 추정되는 곳의 협박과 감시를 느끼고서 뒷주머니에 가스총을 차고 다녔다고 한다.
정계에 처음 입문한 건 2006년. 지선, 총선에서 연거푸 쓴잔을 마신 뒤 재선 성남시장을 지냈다. 초기에 속했던 이른바 '정동영계'가 이후 힘을 잃으면서 당 주류와는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이른바 '친문계(親문재인)'와 갈등이 깊었다. 2017년 대선 경선에서 문재인 후보와, 다음 해 경기도지사 경선에서 전해철 후보와 맞붙는 과정에 앙금이 쌓였다. 문재인 대통령 극성 지지자, 자칭 '문파(文派)'의 문자폭탄이 그에게 집중된 이유다.
때문에 자연스레 '족보 없는' 비주류로 줄곧 묘사됐다. 경기지사를 지내며 대권 주자로 체급을 불리면서도, 유독 중앙무대에는 세력을 확보하지 못했다. 현역 국회의원 중 연수원 동기인 정성호, 성남시장 시절 가까웠던 김영진 외에는 오랜 측근이 없다.
이해찬 지원 이후 '훨훨'…대장동 역결집
이후 한동안 이낙연 전 대표와 함께 백중세를 이루다 올 초부터 기세를 잡았다. 이 전 대표가 느닷없이 두 전직 대통령 사면을 건의하겠다고 밝힌 뒤 개혁 성향 친문 지지층이 대거 이탈했기 때문이다.
특히 친노(親노무현) 좌장인 이해찬 전 대표 지원이 결정적이었다. '못 미덥다'던 친문 인사 상당수가 눈치 보지 않고 결합할 수 있던 것도 그 덕분이다.
이제는 그에게 '비주류'라는 수식도 그리 자연스럽지 않게 됐다. '신주류'라는 말까지 나온다. '친문', '비문'을 따지던 민주당에선 요즘 '이재명계냐, 아니냐' 하는 질문이 먼저 오간다.
다만 앞으로 본선이란 과제가 놓여 있다. 당선될 경우 역사의 새 페이지를 쓰겠지만 그러지 못한다면 한동안 책임론을 피하기 어려울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