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는 지난 7일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주재로 관계장관회의를 열고 미국의 반도체 정보 제공 요청에 대한 대응 방향을 논의했다. 앞서 미국 행정부는 지난달 반도체 공급 부족 현상의 원인 파악을 명목으로 삼성전자 등 주요 반도체 기업에 고객 명단·재고 현황·증산 계획 등 영업기밀 제출을 요구했다.
정부는 특히 '대외경제안보전략회의'의 첫 안건으로 미국의 반도체 정보 요구에 대한 대응책을 중점적으로 논의할 예정이다. 이달 신설되는 대외경제안보전략회의는 국가 간 경제·기술 경쟁 심화에 대응하는 경제·안보 장관급 협의체로, 경제분야 NSC(국가안전보장회의)에 해당한다.
정부는 "미국 측과는 지난 5월 한미 정상회담 이후 구축된 양측의 반도체 협력 파트너십을 토대로 다양한 채널을 통해 협의하기로 했다"며 "우리 기업의 입장이 중요한 만큼 업계와 소통을 보다 강화하겠다"고 말했다.
당초 반도체 업계에서는 미국의 요구가 과도하다는 지적이 쏟아졌다. 미국이 '자발적'이라는 단서를 달았지만 대부분 영업 기밀에 해당하는 내용이어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곤혹스러운 상황이었다. 두 회사는 "입장 없음" 혹은 "내부 검토중"이라고만 대응하며 속앓이를 했다.
대만의 쿵밍신 국가발전협의회(NDC) 장관은 "TSMC는 고객의 기밀 데이터를 공개하지 않으며 고객과 주주의 권리를 위태롭게 하는 관행에는 관여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NDC는 TSMC의 핵심 주주로, 쿵밍신 장관은 TSMC 이사회 소속이기도 하다.
우리 정부의 미온적 대응은 국회에서도 질타를 받았다. 지난 5일 국회에서 열린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조정훈 시대전환 의원은 문승욱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을 상대로 "대한민국 산업부가 왜 미국 편을 들고 있냐"고 지적했다.
문 장관은 "반드시 공개적으로 말하는 것이 최선은 아니라고 생각한다"며 "미국 정부에 우리의 우려 사항을 전달했고 계속 협의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업계와 지속적으로 소통하며 물밑에서 적절히 대응하고 있다는 취지의 반론이었다.
이에 대해 미국 측은 "글로벌 반도체 수급문제를 해결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조치로 이해한다"면서 "향후 한국 정부의 우려에 대해 관계부처와 검토하겠다"고 답했다고 우리 정부는 전했다.
미국이 요구한 자료 제출 시한은 다음달 8일까지다. 반도체 업계가 고심하는 사이 정부가 '물밑 대화'에서 '우려 전달'로, 또 '공개 논의'로 대응 수위를 높여 나가면서 미국 정부의 태도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을지 주목된다.
업계 관계자는 "한국과 대만은 글로벌 반도체 시장에서 메모리와 시스템반도체 모두 70% 이상을 차지하는 주요 생산 기지"라며 "양국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 영업비밀은 보호하고 최소한의 정보만 제공하는 식으로 협의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