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압구정 현대아파트 경비원들에게 최근 희소식 하나가 찾아왔습니다. 쉬는 시간 없이 사실상 하루 24시간 격일로 일해온 경비원들에게, 그동안 덜 지급한 임금을 제대로 주라는 대법원 승소 판결이었습니다. 여기까지 오는데만 3년반이 걸렸습니다.
이번 승소로 경비원 30명은 입주자대표회의로부터 7억5천만원 정도의 못받은 임금을 받게 됐습니다. 1명당 적게는 1천만원 남짓, 많게는 3천만원 가까이 지급됩니다. 초과근무와 야간수당에 퇴직금 차액까지 모두 합한 금액입니다. 평균 10년 가까이 일한 경력 치고 그리 많은 액수는 아닙니다. 더구나 그중 대부분은 2018년초 집단 해고로 하루 아침에 생계를 잃었습니다.
사실 1심만 해도 법원은 입주자대표회의, 즉 사측 편에 섰습니다. 경비원들에게 주어진 하루 6시간의 휴게시간(점심·저녁 각 1시간·야간 4시간)이 진짜 쉬는 시간인지, 아니면 근로시간으로 볼지가 쟁점이었는데 1심 법원은 경비원들이 그시간 동안 정말로 누구의 간섭도 없이 쉬었다고 결론내렸습니다. 그런데 그 판단의 근거가 좀 황당했습니다.
▶ 19. 9. 19. 서울중앙지법 1심 판결문 中 |
피고가 휴게시간에 원고들에게 휴식을 취하지 말라는 지시를 내린 바는 없으며 …(중략)… 입주민들이 개별적으로 원고들에게 주차관리 등의 업무를 맡기는 경우가 있었다 하더라도 …(중략)… 경비원들에게 주차관리를 맡기는 입주민들은 통상적으로 3~5만원을 수고비 명목으로 지급해 왔다 |
더군다나 휴게시간에 경비원을 시켜 주차를 맡긴 입주민들이 수고비로 3만~5만원을 줬다고 명시한 부분은 두눈을 의심하게 만듭니다. 41개동 3130세대의 대단지임에도 지하 주차장이 없는 압구정 현대아파트에서 주차난은 지금도 골칫거리입니다. 이중주차에 단지밖 불법주차가 빈번한데, 이를 관리하는 '발렛서비스'는 경비원들이 전담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 만큼 주차 문제를 둘러싼 단지 내 갈등이 잦았습니다. 입주민들의 비인격적인 대우도 수차례 언론에 조명됐습니다. 주야를 불문한채 이어진 '발렛서비스'는 경비원들이 임금 소송을 낸 주된 이유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법원은 경비원들의 주장을 꺾으면서 '입주민들이 수고비를 줬다'고 적었습니다. 휴게시간에 조금 일해도 '돈 받았으면 된 거 아니냐'는 취지로 들립니다. 경비원들에게 돈을 줘야하는 건 입주민이 아닌 사측이고, 이들의 소송 상대방도 마찬가지 입주민이 아닌 사측인데도 말이죠.
1심 법원의 이같은 판단을 뒤집고 2심과 대법원은 경비원들의 손을 들어줬습니다. 이들이 사실상 노동을 했다고 주장한 '1일 6시간의 휴게시간'을 모두 근로시간으로 인정했습니다. 긴 소송 끝에 미지급 임금을 받게 된 경비원들에게는 더없이 좋은 결과입니다. 그런데 경비원들이 패소한 1심 판결문보다 승소한 2심 판결문이 왜 그런지 마음을 더 씁쓸하게 만듭니다.
2심 법원의 판결문은 총 15쪽입니다. 여기서 2심 재판부가 고쳐 쓴 부분은 9쪽이 조금 넘습니다. 그리고 법원은 판결문 가운데 상당 부분인 4~5쪽을 경비원들의 근로 실태와 처우를 설명하는데 할애했습니다. 그중 경비초소의 환경을 기술한 부분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경비초소는 각 동마다 균일하게 가로 1.6m, 세로 2m 직사각형 형태로서 초소 내부 면적은 약 3.2㎡에 불과했기 때문에, 책상과 간이의자 이외에 별도로 휴게를 위한 시설을 설치할 만한 공간이 없었다." 이어지는 내용에서도 경비원들의 열악한 근무 환경이 고스란히 묻어납니다.
▶ 21. 3. 26. 서울중앙지법 2심 판결문 中 |
아파트 41개동 중 14개동 지하에 경비원들이 이용할 수 있는 간이 화장실(샤워를 위한 시설은 없었음)을 설치해 놓았을 뿐, 동별 경비초소에 별도로 부속된 수도·탕비시설, 화장실이 없었다. 그리고 동별 경비초소에는 하절기 더위를 대비한 에어컨, 냉장고도 설치되어 있지 않았다 …(중략)… 입주민들은 민원이 발생할 때마다 시간 불문하고 경비초소로 직접 방문하거나 경비원의 개인 휴대전화로 연락하는 방법을 취했다. 경비원들은 경비초소 내부가 협소함에도 도난·분실, 우천시 택배 손상 우려로 인해 경비실 내 택배를 보관했다 …(중략)… 사측은 2014. 10경 처음으로 단가 3만 5천원 상당의 3단 접이식 간이침대 50개를 각 경비초소에 공급했다 |
1심 법원은 야간 휴게시간에는 주차관리가 거의 없었다고 했지만, 2심 판결문에 기재된 증거는 달랐습니다. 어떤 동의 경우 한달 20차례 넘게 야간 주차관리가 이뤄졌고, 심야 음식배달 차량 관리도 경비원들의 몫이었습니다. 그와중에 사측이 매월 실시하는 산업안전보건교육시간에는 근로자 인권과 동떨어진 지시사항이 다수였습니다.
▶ 2심 판결문 '사측의 지휘·감독 형태' 中 |
①탈모(모자벗기) 행위를 금하고, 지급된 복장을 착용할 것 ②무전기를 상시 휴대하고, 호출시 응답을 철저히 할 것 ③주차 문제로 민원이 발생하지 않도록 유의하고, 차량 이동시 접촉사고에 주의할 것 ④근무중 자리를 이탈해선 안 되고 TV·책·신문·스마트폰·DMB 시청·게임 등을 금할 것 ⑤밤늦게 귀가하는 차량은 이상유무(흠집, 접촉사고)를 확인할 것 ⑥근무 중 수면행위는 절대 금하고, 근무태도 불량으로 지적받지 않도록 특히 유의할 것 |
압구정 현대아파트에서 10년 넘게 일했고 이번 소송에도 동참했던 경비원 김모씨는 지난해 3월 58살의 나이로 사망했습니다. 사인은 급성 심근경색으로,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는 과로사라고 판정했습니다. 올초에도 같은 압구정 현대아파트 경비원이 집으로 귀가하는 길에 숨졌습니다. 이렇게 김씨처럼 과로사로 세상을 떠났거나 과로성 질환을 인정받은 경비원이 최근 3년간 247명에 달한다는 통계도 있습니다.
입주민 폭행에 시달리던 경비원 최희석씨가 세상을 떠난지 2년 4개월이 지났습니다. 압구정 신현대아파트에서 주민의 폭언을 이기지 못한 경비원이 분신 사망한지는 7년이 다 돼갑니다. 그때마다 내놓은 땜질식 처방들은 제대로 현실화된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나마 갑질 입주민을 처벌하는 근로기준법 개정안이 최희석씨 사망 이후 국회에 발의됐지만, 여지껏 상임위 문턱조차 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번 판결로 경비 노동자들의 현장을 다시 돌아보는 계기가 만들어지기를 바라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