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 통치자였던 미군정 존 하지 장군이 작성한 '한국 상황'이라는 제목의 문서를 주목해 달라는 내용이다.
신탁통치 반대 및 즉각적 독립을 바라는 한국 국민들의 여론을 현장에서 가장 잘 알고 있던 미군정이 당시 상황을 있는 그대로 보고한 것이다.
그러나 열흘 뒤 미국, 소련, 영국은 모스크바에서 한국에 대한 최장 5년간의 신탁통치에 끝내 합의하고 만다.
합의 사흘 뒤 이후 미군정은 당시 한국의 상황을 이렇게 전했다.
그러나 신탁통치 결정 이후 한반도는 찬탁과 반탁으로 갈려 극심한 갈등과 혼란으로 난장판이 된다.
미군정은 바로 그런 상황을 우려했기 때문에 신탁통치 전략 철폐를 원했던 것으로 보인다.
사실 미군정은 12월 16일 이전에도 여러 차례 비슷한 내용을 상부에 보고했다.
가장 먼저는 미군정이 남한 점령을 한 뒤 정확히 일주일 만에 나왔다.
한국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 채 점령을 시작한 미군정 관계자들이 당시 남한사회를 이해하기 시작한 직후다.
한달간 한국을 관찰하면서 한국을 새롭게 발견한 것에 대한 참회록처럼 읽히는 글이다. 핵심 내용은 역시 신탁통치가 한국의 현실과 맞지 않다는 것이다.
특히 11월 20일 정치고문 랭던의 보고에 대해 국무부는 오히려 아래와 같은 지침을 하달했다.
신탁통치 정국이 펼쳐지기 전까지 만해도 한반도에서는 일제청산, 친일척결이라는 단일 목표에 국민적 열의가 집중됐다.
그러나 신탁통치 결정 이후 일제극복이라는 대의명분은 사라지고 대신 찬탁 대 반탁으로 국론이 극심하게 분열된다.
고려대 정일준 교수(사회학)는 "그때 까지는 한반도에는 미국과 소련에 의한 군사적 분할이 있었다. 그러나 신탁통치 결정 이후에는 권력의 블록화, 즉 정치 세력화에 의한 국토 분단이 생긴다. 결국 신탁통치 결정은 외적 분할이 내적 분단으로 가는 중요한 터닝 포인트였다"고 말했다.
남한에서 찬탁 반탁 세력 간 사생결단식 투쟁 속에 해방직전 미국이 편의적으로 그은 지도위의 38도선은 점차 사실상의 '국경선'으로 굳어져 갔다.
결국 남북한은 단독정부 수립으로 제 갈 길을 걷게 됐고, 당초 신탁통치 로드맵에 따라 늦어도 한국의 독립이 실현될 것으로 예상됐던 1950년, 한반도에선 독립대신 동족상잔의 비극이 터지고 만다.
당시 미국은 전후 처리를 하면서 제국주의 식민 국가들에 공통적으로 신탁통치를 적용하려고 했던 만큼 한국도 예외일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제국주의 극복과 독립에 대한 열의가 지구촌 어느 나라보다 강렬했던 한국적 상황에 대한 몰이해에서 수립됐던 미국의 1940년대 한반도 정책은 결과적으로 분단의 씨앗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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