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권의 유력 대권주자인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주 52시간 근로제를 비판하면서 '주 120시간 근무'를 언급해 논란이 일고 있다. 좋은 일자리와 나쁜 일자리의 격차를 줄이려는 '진짜 필요한 고민'이 증발한 자리엔 '노사의 자율적 합의'라는 환상만 남아있다는 지적이다.
윤 전 총장은 20일 매일경제와의 인터뷰에서 "게임 하나 개발하려면 한 주에 52시간이 아니라 일주일에 120시간이라도 바짝 일하고, 이후에 마음껏 쉴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앞서 스타트업 청년들을 만나 들었던 내용을 바탕으로 52시간 근로제가 문제라고 언급한 것이다.
이같은 발언이 보도가 되자마자 여권은 물론이고 노동계와 노동 현장에서는 비판이 쏟아져 나왔다. 당장 '120 시간'이 뜨거운 감자다. 워라밸을 중시하는 한국 사회에서 산업혁명 시대나 아우슈비츠 때만도 못한 기준을 들이댔기 때문이다. 120시간을 토일 모두 일한다고 가정하면, 하루 평균 17시간 이상 일해야 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실제로 산업혁명 시대 영국의 성인 노동자들은 보통 12~16시간씩 일했다는 것을 감안하면, 윤 전 총장의 노동 감수성이 얼마나 낮은지를 실감할 수 있다. 워라밸은 차치하고, 기본적인 생존권이 위협받는 수준의 노동 시간을 예로 든 것이다. 실제 산업혁명 당시 영국 노동자계급은 평균수명이 대략 20대 초반이었고, 지역적으로 생활환경과 노동조건이 가장 좋은 곳에서조차 28세를 넘지 못했었다. 현재 과로사 인정 기준은 4주동안 주 64시간 일했을 때이며, 세계보건기구(WHO) 산하 국제암연구소는 야근을 2군 발암물질로 분류하고 있다.
"주 52시간 제도 시행에 예외조항을 두고 조건을 합의하거나 선택할 수 있게 해달라 요청했다"며 노사 간 근무시간을 합의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주장한 부분에서 윤 전 총장은 현행 제도와 현장의 상황을 전혀 알고 있지 않다는 것만 확인됐다. 특정 사원을 임원급으로 분류해 52시간 근로제를 우회하는 방안은 현장에선 공공연한 비밀이다. 사용자와 개발자의 이익 배분이 확실하다면, 재량근무제 같은 현행 제도를 이용해 관련 문제에 접근할 수도 있다. 노동자의 의견이 최대한 반영되지 않은 상황에서 노측이 사측을 상대로 탄력적 근무를 '조율'하는 것은 쉽지 않은 것만이 분명한 현실이다.
한 중견기업 노동조합 간부는 "법이 강제하니까 적어도 '법은 지켜야 하지 않냐'며 사측에 근무시간에 대한 압박이 가능한 것"이라며 "업무 내용에 따라 노사가 알아서 합의하라고 하면, 최대 이익이 목적인 회사는 높은 목표치를 내놓고 더 많은 업무를 처리하라고 나오는 게 당연"하다고 말했다. "더 많이 일하게 해달라"는 게 아니라 "더 많은 임금, 대신 효율적으로 일하게 해달라"는 게 대다수 노동자들의 요구다. 설사 '120시간을 일하고 쭉 쉴 수 있는 업무'가 존재한다고 해도, 1주간 일하고 3주간 쉬는 사이클을 가진 기업은 게임개발업체처럼 극소수, 그 기업 안에서도 매우 한정된 규모다.
장시간 근로로 악명 높은 한국에서 52시간 근로제도가 그 취지에도 불구하고 비판 받는 지점은 근무시간 자체가 짧다는 게 아니라, 이 과정에서 노동자는 실제 소득이 깎이는 일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또 자영업자나 중소사업주는 이익이 감소하는 상황도 있다. 이 문제는 '초과근무를 해야만 생계가 유지되는' 상황, 즉 좋은 일자리와 나쁜 일자리의 격차를 어떻게 줄여야 되는지에 대한 고민이 해결책과 연결돼 있다. 또한 낮은 인건비에 기대야만 이익을 기대할 수밖에 없는 산업현실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지가 핵심이다. "더 일하자"라고 간단히 답변할 문제가 아니라 깊고 오랜 고민이 필요한 이슈들이다.
제조업 중심 시절처럼 '물리적노동 시간'만이 경쟁력이던 시대도 아니다 보니, 4차 산업시대와 창의성에 대해 얘기하는 윤 전 총장이 산업 경쟁력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조차 없어 보인다는 지적도 나온다. 야권 관계자는 "지역과 계층, 세대를 초월하는 외연확장을 줄곧 강조하고 있는 윤 전 총장이 대다수 월급쟁이들과 워라밸을 중시하는 젊은 층이 등을 돌릴 만한 발언을 했다고 본다"고 말했다. 당장 젊은 층이 주로 이용하는 SNS를 중심으로는 "120시간 일하고 쉬면된다. 무덤에서"라는 자조가 쏟아져 나왔다.
이에 대해 윤 전 총장은 이날 대구에서 기자들을 만나 "마치 제가 120시간씩 일하라고 했다는 식으로 왜곡하고 있다"며 발언 취지와 맥락이 무시됐다고 주장했다. "일의 종류에 따라서 노사간의 합의에 의해서 변경할 수 있는, 근로자 스스로도 이게 우리에게 유리하겠다 해서 그런 조건에 대해 자기결정권을 해주는 것이 기업 뿐 아니라 근로자에게도 좋은 경우에 (52시간제) 예외를 넓게 둬야 하지 않냐"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