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적으로 엄혹했던 1943년 국제사회가 대한민국 독립을 약속한 '카이로선언', 대한민국 독립을 재확인한 '포츠담선언' 역시 임정이 아니었다면 나오기 힘든 결과물들이다. 특히 임정은 광복군을 편성해 연합군의 일원으로 일본군과 전쟁을 치르기도 했다.
이에 따라 임정은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인정받아 프랑스 등 일부 국가들과는 형식상이기는 하지만 외교관계를 수립하기까지 했지만, 미국은 어찌 된 일인지 임정의 존재를 부인했다.
당시 임정은 주미외교위 위원장으로 있던 이승만을 통해 미국에 존재를 인정받기 위한 다양한 노력을 했다.
1945년 5월 15일 이승만은 미국 해리 트루먼 대통령에게 아래 서한을 보낸다.
7월 9일 자 국무부의 기밀문서(아래사진)에는 미국 정부의 임정에 대한 입장이 잘 정리돼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한 입장'이라는 제목의 6페이지로 된 이 기밀문서는 3.1운동 이후 국내외 3개의 임시정부가 통합돼 지금의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결성돼 해외 한국 독립운동의 구심점이 돼 왔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임정은 현재 통치권자의 자격이 없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고 못 박았다. 또 지금이야 정부 형태를 취할 수는 있겠지만 일제강점 이후에는 통치 '능력'을 갖추지 못할 것이라고 진단했다. 그리고 일제강점 이후엔 과도적인 국제기구가 통치권자가 될 것이라고도 예언했다.
결국 이후 역사적 상황 전개로 보면 미국은 그 당시부터 한국에 대한 신탁통치를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미국은 임정의 존재를 부인하면서도 임정의 '정부' 활동을 그 이전부터 계속 인지하고 있었다.
1945년 3월 1일 임정이 있던 충칭의 전권대사 아치슨은 임정 외교장관 조소앙과의 양국 간 군사협력 방안에 대한 면담 내용을 본국에 타전하면서 광복군이 독일에 대해 선전포고를 했다는 사실을 전했다. 이에 대해 미국 국무부 장관 대행은 3월 20일 아래와 같은 전문을 주중미국대사에게 내려보내 수용 가능성을 내보였다.
8월 15일 해방을 맞게 되고 한국에서는 여러 조직 및 세력들의 정치활동이 본격화된다. 임정도 본국으로 즉각 귀환하기를 희망한다는 의사를 대외에 타진한다. 주중 미국대사 헐리는 8월 31일 "미국이 임정 요인들에 대해 점령군의 조력자나 통역자로서 또는 미국에 적합한 다른 어떤 방식으로든 한국에 입국하는 것을 허용하기를 그들은 바라고 있다"고 본국에 전했다.(아래 붉은상자)
미국 군정이 한국에 입성한 직후인 9월 12일 자 전문에서도 헐리는 임정이 본국 송환에 미군의 도움을 요청해왔다고 재차 본국에 알렸다.
헐리는 "그(임정 관계자)는 한국 단체들에 대한 미국 정부의 정책을 알고 있지만, 한국 임시 정부가 새로운 한국 정부 구성에 참여할 기회가 있어야만 공정할 것이라고 느꼈다고 말했다"고 보고했다.(아래 노란상자)
그러나 미국은 계속 주시하기만 했다.
그러던 중 남한을 점령한 미군들의 소극적인 일제 청산에 국민들의 분노가 커진 뒤에야 해외 지도자들의 귀국에 본격적으로 협조하기 시작한다.
다만 임정에 대해서는 '임정'이라는 타이틀 대신 개인자격으로 귀국할 것을 요구한다. 그래야 군 수송기를 대절해줄 수 있다는 것이다.
미국이 가장 '먼저' 귀국시킨 사람은 가장 '멀리'있던 이승만이었다. 이승만은 10월 13일 도쿄에 도착한다. 이승만은 도쿄에서 4일을 머물며 맥아더 등과 한국 정세에 대해 의견을 나눈다. 이어 16일 귀국한다.
미국은 이승만을 '미군정의 손님'이라고 표현하며 깍듯이 예우한다. 귀국 직후에는 기자회견도 열어준다
미군정은 이승만을 '협력자'로 세우려는 복안을 가지고 있었다.
반면, 미국은 이승만을 귀국시킨 뒤 한 달이 지나도록 다른 임정 요인들은 귀국시키지 않았다. 그러면서 임정 활용 방안만 논의했다. 이승만을 미군정의 협력자로 봤던 미군정은 임정에게는 이승만의 조력자 역할을 기대했다.
미국이 임정 요인들을 입국시킨 것은 11월 23일. 그러나 개인자격 입국임을 확인시키기 위해서였는지 두 차례로 나눠서 입국시켰다. 특히 2진은 9일이나 지난 뒤 그것도 여의도공항이 아닌 군산공항을 통해 입국시켰다.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은 CBS노컷뉴스와 인터뷰에서 "1945년 가을은 하루가 다르게 국내 정세가 요동치던 때였다. 개인자격에다 귀국까지 늦어지고 더군다나 9일 늦게 도착한 2진들 불만까지 겹치면서 임정 내부에도 갈등이 컸다. 서울에서 첫 국무회의를 했을 때도 그 문제로 언쟁이 있었고 결국 임정이 분화되고 만다"고 말했다.
특히 당시 미국은 이승만 귀국 때와는 달리 임정요인들의 귀국 사실을 국민들에게 알리지 않았다.
김 전 관장은 "미국의 입장에서는 한국에 친미 정권을 세우고 싶었기 때문에 강한 민족주의 성향을 가진 임정을 배격했다. 그래서 미국에서 살고 있던 친미적인 이승만을 다른 임정요인들보다 일찍 들여보낸 것이다"는 분석을 내놓았다.
그는 이어 "미군 내에는 광복군 책임자까지 두고 광복군과 협력하면서 서울 진공작전까지 함께 논의했다. 필요할 땐 임정을 활용하고 필요성이 없어지니 버린 것"이라고 덧붙였다.
우리 국민들은 12월 19일에 임정 귀국을 환영하는 행사를 열었다. 그러나 이 때는 한국의 독립을 유예하는 '신탁통치' 결정이 내려지기 불과 일주일 전이었다.
김 전 관장은 "당시 임정의 입장은 좌우 합작이었다. 연안파도 임정 노선에 참여하겠다고 밝힌 상황이었다. 미국이 임정을 (45년) 8월 말이나 이승만 귀국 시점만에도 환국시켰다면 좌우를 대표하는 연합정권이 수립됐을 것이고 그랬다면 소련도 젊은 김일성을 내세워 뒤에서 정치공작을 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남한 내 무주공산으로 인한 정치적 사회적 혼란상, 그 틈을 탄 친일파들의 득세, 뒤이어 발생한 여순사건, 제주4.3사건 그리고 한반도 분단고착화의 모든 원인 가운데 기본 원인은 미국의 한반도 정책의 실패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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