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10일 진행 예정이었던 일제 시기 강제징용 피해자와 유족들이 낸 손해배상소송 판결 선고기일을 7일 당일로 급작스럽게 변경한 이유에 대해 재판부가 내놓은 설명이다. 3년 전 강제징용 사건에서 일본 기업의 배상 책임을 인정한 대법원의 판단과 정반대 결론을 낸 이번 판결을 두고 적잖은 파장이 예상되는 가운데 선고를 앞당긴 이유 등 절차도 부적절했다는 비판이 나온다.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34부(김양호 부장판사)는 7일 오후 2시 일제 강제징용 노동 피해자와 유족 80여명이 일본제철·미쓰비시중공업·닛산화학·스미토모 금속광산 등 일본 기업 16곳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소송에서 원고 측의 소송을 각하한다고 판결했다.
당초 이 사건은 이날(7일) 기준 하루 전인 주말까지만 해도 오는 10일에 1심 판결 선고가 진행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재판부는 이날 오전에 급작스럽게 선고를 오후에 진행하기로 변경했고 원고 측 소송 대리인 또한, 오전에서야 선고기일 변경 결정을 전달받은 것으로 파악됐다.
통상 선고기일이 재판부 내 합의나 판결문 작성 등 실무적인 이유로 미뤄지는 경우가 있어도 이번과 같이 기존 일정 앞으로 당겨지는 경우는 극히 이례적이다. 15년 가까이 재판 변론을 해온 한 변호사는 "선고기일을 앞당기는 경우는 그간 재판하며 한 번도 본 적 없다"고 의아함을 표했다.
이런 만큼 변경 이유에 대해 관심이 집중된 가운데 재판부는 법정에서 이를 따로 언급하지는 않았다. 다만 선고 후 설명자료로 판결 요지와 함께 "당사자에게 고지하지 않더라도 위법하지 않은 바 이 사건은 법정의 평온과 안정 등 제반 사정을 고려하여 판결선고기일을 변경했다"며 "소송대리인들에게는 전자송달 및 전화연락 등으로 고지했다"고 밝혔다.
'법적 문제가 없으며 원활한 선고 진행을 위해서였다'는 설명이지만 원고 측은 쉽게 납득이 어렵다는 반응을 보였다. 피해자 측 소송을 대리한 강길 변호사는 "20년 차 변호사 생활을 하며 처음 보는 경우고 초유의 경험이라 황당하다"며 "형식적으로 문제는 안 되어도 실질적으로는 피해자 측의 권리를 침범한 것으로 보인다. 본래 선고기일 참석 여부는 유족이 결정할 문제인데 이에 대한 선택권을 박탈해버린 것 아니냐"고 말했다.
그러면서 "만약 공개재판에서 (소란이 있다면) 법정 지휘권을 행사하면 되는 것인데 이 판결에 대한 정당성을 재판부 스스로도 납득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며 "법리에 따라 판단하고 선고하면 되는 것이지 이런 방식으로 선고기일을 바꾸는 것은 불법은 아니라도 매우 이례적이고 부당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고 꼬집었다.
최정규 변호사는 "이 선고를 듣기 위해 기다리는 분들도 많았을 것이고 특히 서울에 당일 올라오기 어려운 사정에 있는 분들도 있을 텐데 이들의 권리를 박탈한 것"이라며 "(원고들이 원하지 않는) 결과가 나왔다고 하더라도 법정에서 결과를 우선 받아들이고 항소장을 제출할 것인데도 마치 품위를 다 내던지고 자신들(재판부)에게 가해를 할 것 같은 사람으로 치부를 하는 것인지 의아하다"고 말했다.
선고기일 변경을 둘러싼 절차와 별개로 이 사건 재판부가 3년 전 대법원 전원합의체 결정과 정반대 취지로 판결한 점도 파장이 이어지고 있다. 재판부는 "한일 청구권 협정에 의해서 바로 소멸되거나 포기됐다고는 할 수 없지만 소송으로 이를 행사할 수는 없다"는 취지로 소 각하 판결을 내리며 추후 설명자료에서 "2018년 10월 30일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의 소수의견과 결론적으로 동일하다"고 덧붙였다.
대법 전합은 다른 강제징용 피해자 4명이 일본제철(옛 신일본제철)을 상대로 낸 비슷한 사건의 손해배상청구 소송 상고심에서 다수 의견(7명)으로 일본 기업의 배상 책임을 인정하며 손해배상청구권은 한일 청구권 협정의 적용대상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점을 주된 근거로 들었다. 반면 당시 권순일·조재연 대법관의 경우 소수의견으로 "청구권협정에 따라 피해자들의 배상청구권이 제한되는 것으로 봐야 한다"며 전합 결정과 반대의견을 낸 바 있다.
재판부도 이 대목을 의식한 듯 직접 대법 판결과 판단이 달라진 부분을 판결에서 언급하며 "국내 최고재판소의 판결이지만 식민지배의 불법성과 이에 터잡은 징용의 불법성을 전제로 하는 바 이는 살펴본 바와 같이 국내법적 해석에 불과하다"며 "이 사건 피해자들의 청구권 등에 관하여 보상 또는 배상하기로 한 '조약'인 청구권협정의 불이행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고 판시했다.
하지만 이같은 대법 전합 판결을 뒤집은 재판부의 결정에 대해서도 '빈약한 근거에 의거한 한 발 후퇴한 판결'로 보는 시각이 적지 않다.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등 16개 시민단체는 "대법원에서 최근 정립된 청구권협정에 대한 해석에 대해 특별히 새로운 법리적 논거 없이 이를 따르지 않으면서, 오히려 비본질적, 비법률적 근거를 들어 판결을 선고했다"며 그 근거로 재판부가 판결 후 집행 과정에 대한 우려를 언급한 점을 들었다.
이들은 "민사 사건 본안 재판은 원고와 피고 간 권리의 존재 여부를 판단하면 될 뿐인데 왜 판결 확정 후 집행단계의 사정을 판단의 근거로 삼는지 납득할 수 없다"며 "민사 본안 재판에서 비본질적인 집행단계의 문제를 청구 각하의 근거로 설시한 것은, 그만큼 이 사건 판결 논리의 빈곤함을 보여주는 것이다"고 이번 재판부의 판결을 꼬집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