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2월 하노이 북미정상회담이 뜻밖에 결렬되자 북한은 심야 기자회견을 열어 미국에 원망과 분노를 쏟아냈다. 부푼 기대를 안고 장장 60시간 기차를 타고 온 최고 지도자를 볼 낯이 없었을 것이다.
북한은 이후 대화 재개의 조건으로 적대시 정책 철회를 내세우며 오히려 문턱을 높였다. 웬만한 접촉 시도에는 미동조차 하지 않는다. 자존심에 깊게 파인 상처, 하노이 트라우마다.
그런 북한에게 한미 양국 정상이 새로운 제안을 했다. 판문점 선언과 싱가포르 공동성명 존중, 남북 대화와 협력 지지, 대북특별대표 임명 등이다. 외교적 해법과 단계적 접근 등 이미 공개된 내용에 북한이 솔깃할 메뉴를 더 추가했다. 인권 문제도 거론했지만 수위는 낮췄다.
이는 분명 과거에 비해 훨씬 전향적 제안이다. 정의용 외교부 장관은 25일 브리핑에서 "전반적으로 북한에 대해 매우 긍정적 메시지를 발신한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북한이 호응하기에는 여전히 '2%' 부족하다는 게 일반적 관측이다. 미국의 기류가 전보다 크게 완화된 것은 사실이지만 딱히 손에 잡히는 구체성은 없다.
양무진 북한대학원대학 교수는 북한도 마냥 '강대강'으로 나갈 명분이 없고 내적 필요성 등의 이유로 조만간 화답할 것으로 전망했다. 하지만 이런 시각은 많지 않다.
◇ 적대시 정책 철회 요구에 대한 고려 필요…현실적 가능성은 낮아
따라서 북한을 대화 테이블에 앉히려면 그들의 요구인 적대시 정책 철회에 대해 어떤 식으로든 응답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다.
적대시 정책은 한미연합훈련이나 인권 비판 같은 생존권(체제 안전)과 제재 완화·해제 등 발전권에 대한 것이다. 문제는 이 가운데 무엇도 미국이 쉽게 양보할 수 없는 사안이라는 점이다.
제재는 한미 정상 공동성명에서도 "유엔 안보리 관련 결의를 완전히 이행할 것을 촉구"한 사안이다. 인권은 바이든 정부가 가장 집중하는 사안 중 하나다.
한미훈련의 경우는 트럼프 집권 시절 잠시 축소·유예된 선례가 있지만 미 군부의 불만이 그만큼 쌓여가고 있다. 이미 많이 양보했다고 생각할 미국이 또다시 대북 유화책을 내놓기를 기대하기도 어렵다. 한국군 백신 제공이 8월 한미훈련용이라는 억측마저 나오는 판이다.
그렇다면 북미 간 중재는 다시 한국의 몫일 수밖에 없다. 마침 이번에 미국은 남북 대화와 간여, 협력에 대한 지지를 표명함으로써 우리의 활동 공간도 열렸다.
김준형 국립외교원장은 24일 토론회에서 "미국이 과거 우리의 대북정책을 승인했다고 해석하고 반 발짝, 한 발짝 더 저지르는 게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대북제재 레짐'이 성역처럼 버티고 선 상황에선 남북의 자율 공간이 매우 제한적이다. 북한의 하노이 트라우마는 엉뚱하게도 한국에 대한 원망으로 변이돼 남북 간 신뢰도 바닥 수준이다.
코로나 백신 제공조차 거부하는 북한을 움직이려면 개성공단이나 최소한 금강산 관광 정도는 거론해야 하는데 현 상황에선 기대하기 어렵다.
◇ 분위기 바뀐 것은 분명하나 2%25 부족…남은 변수는 북한
결국 한반도 정세가 분명 순풍으로 바뀌긴 했지만 충분치 않고, 해법은 보일 듯 말 듯 할 뿐 확실하지 않다.
만약 한국과 중국의 역할에는 한계가 있고, 미국은 할 만큼 했다며 더 움직이지 않는 상황에서 북한마저 '자력갱생'으로 버티기만 한다면 어떻게 될까?
김대중-클린턴 파트너십 이후 20년 만에 찾아온 황금 기회는 오래 머물지 않는다. 임기 말 문재인 대통령과 내년 중간선거를 앞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으로선 마지막 대북 공동 제안이나 마찬가지다.
한국 내 진보세력조차 북한 지도부 행태를 비판하는 것 중 하나가 이른바 '통미봉남'이다. 그럼에도 문재인 정부는 '미국산 앵무새'라는 턱없는 비난 속에서도 미국의 완고한 태도를 녹여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싱가포르 공동성명 뿐 아니라 그 원류 격인 판문점 선언을 한미 공동성명에 집어넣은 것은 게 대표적이다. 북한이 어떻게 볼 지 몰라도 한국으로선 최대치에 가까운 노력이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판문점과 싱가포르를 거쳐 하노이에서 결실을 보려 한 것은 영변 핵시설과 부분 제재해제의 교환이었다. 당시 북한은 "완벽한 비핵화로의 여정에는 반드시 이러한 첫 단계공정이 불가피하다"고 했다. 북한이 원하는 단계적 해법이다.
결국 이번엔 북한이 움직일 차례다. 판문점과 싱가포르 이후 하노이로 이어지는 과정에서의 '잃어버린 고리'는 9.19 평양 남북공동선언이다.
김정은 위원장은 이때 미국이 싱가포르 공동성명에 따라 상응조치를 취하면 영변 핵시설의 영구적 폐기와 같은 추가적인 조치를 계속 취해나갈 용의를 표명했다. 이를 토대로 하노이 회담이 성사됐고 어쩌면 역사적 성공을 거둘 수도 있었다.
따라서 북한이 9월 공동선언 승계를 천명한다면 아쉽게 불발된 하노이 회담은 '영변 + 알파'의 단계적 해법으로 부활할 가능성이 있다.
미국도 트럼프식 '최대의 압박'에서 '최대한의 유연성'(Maximum Flexibility)으로 돌아선 마당에 북한이 비현실적 선(先) 적대시 철회를 고집하는 것은 지혜롭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