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년 전 "농지 심사 강화" 의견 나왔지만 무시…"LH사태 단초"

'2기 신도시' 투기 합수본 수사 살펴보니
미공개 정보 이용·허위 농지 취득 등 '판박이'
예방책 내왔지만 무시…"투기 길만 열어줘"

"허위의 농업경영계획서를 작성하는 등 부정한 방법으로 농지취득자격증명서를 교부받아 농지를 매입…", "공무원들이 직무를 이용해 알게된 정보를 이용해 시세차익을 노리고 개발예정지 부근 부동산을 집단으로 매수한 다음 가족들 명의로 명의신탁…", "뇌물을 받고 부동산 관련 정보를 제공하거나 거래허가와 관련된 편의 등을 제공해 주는 등 전문 투기꾼들과 결탁, 부동산 투기를 비호·방조…"(2006년 1월 17일, 부동산투기사범 합동수사본부 보도자료 중)

최근 한국토지주택공사(LH) 직원들의 '부동산 투기' 사태가 낯설지 않은 이유는 16년 전 '2기 신도시 투기 사태' 당시와 '판박이'이기 때문이다. 당시 대검찰청·경찰청·국세청·건설교통부(現 국토교통부)가 합수본을 꾸려 투기 사범을 대대적으로 적발하고, 투기 예방책까지 내놨지만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특히 당시 비농민의 농지 취득을 막기 위한 심사위원회를 구성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왔지만, 시행으로 연결되진 않았다. 오히려 정권이 바뀌면서 '농지 규제 완화'를 이유로 그나마 남아 있던 제도까지 사라졌다. 작금의 'LH 사태'가 예견된 일이라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2006년 1월 17일 '2기 신도시' 관련 부동산 투기를 수사했던 합동수사본부(합수본)의 수사 결과 보도자료. 법무부 제공.
◇'2기 신도시' 투기 1만 5천 명 적발·450명 구속…지금과 '판박이'

9일 CBS노컷뉴스가 법무부로부터 입수한 자료에 따르면 2005년 '2기 신도시' 관련 부동산 투기 사범을 수사했던 합수본은 5개월 수사 끝에 총 1만 5558명을 단속, 455명을 구속했다. 이 중 검찰이 직접 수사한 피의자만 총 3401명으로, 공무원은 42명에 달했다.

합수본은 "부동산 투기자들의 신분이 기획부동산 업체뿐만 아니라 의사·변호사·대학교수·세무사 등 전문 직업인은 물론이고 공무원·프로스포츠선수·자영업자·농민·주부 등을 망라하는 등 다양한 분포를 보이고 있었다"고 밝혔다.

당시 적발된 공무원의 부동산 투기 행위는 지금의 LH 사태와 형태나 수법이 똑같았다. 직무를 이용해 알게 된 정보를 통해 시세차익을 노리고 개발예정지 인근 부동산을 집단으로 매수하는가 하면, 전문 투기꾼들로부터 뇌물을 받고 부동산 관련 정보를 제공하기도 했다. 공무원과 결탁한 부동산 업자가 관공서에서 개발예정도면을 입수한 후 해당 지역 토지를 매수한 경우도 있었다.

농민이 아님에도 허위로 서류를 작성해 농지를 취득, 투기하는 사례도 유사했다. 당시 한 기획부동산 업체는 전남 영암군 소재 농지 약 19만평을 직원 8명 명의로 매수한 후 서울·경기 등에 거주하는 400여 명에게 쪼개서 판매했다. 이 과정에서 해당 지역 사정에 밝은 법무사로 하여금 이들 명의의 농취증신청서 및 영농계획서를 허위로 작성하게 했다.

합수본은 "일부 공무원들이 기획부동산 업체로부터 토지 분할측량 및 지목변경 절차 등의 편의제공을 하거나 부동산 정보를 제공하고 사례로 금품을 받았다"며 "공무원들이 투기세력과 결탁하여 투기행위를 조장하는 사례까지 있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기획부동산 업체나 전문투기꾼들이 토지거래 허가규정을 피하기 위해 허가요건을 갖춘 현지인 명의로 부동산을 매입했다"며 "허위 영농계획서를 작성하는 등 부정한 방법으로 농취증을 교부받아 농지를 매입하는 수법이 전형적"이라고 강조했다.


청사 나서는 남구준 정부 합동 특별수사본부장. 연합뉴스
◇"농취증 심사 강화 필요" 목소리 무시한 정부…"땅투기 길만 열어줘"

합수본은 수사결과를 토대로 제도상 문제점을 지적하고, 투기 예방책까지 내놨다. 특히 기존에 존재했던 투기 예방책인 '농취증' 발급 시스템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이어졌다. 당시 농취증을 발급받기 위해서는 각 시구읍면에 설치돼 있는 '농지관리위원회' 위원 2명으로부터 확인 도장을 받아야 했다.

합수본은 "농취증을 발급함에 있어 형식적인 출장복명만을 토대로 발급하여 주는 등 비농민에 의한 투기행위를 가능케 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며 "일정규모 이상의 농지를 취득하는 경우 현지 이장 등 외부 인사를 포함한 '발급 심사위원회' 등을 구성, 엄격한 심사를 통해 투기행위를 사전에 차단하는 제도적 장치에 대한 검토가 필요하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합수본 발표 이후에도 별다른 제도 개선 움직임은 없었다. 오히려 3년 뒤 정권이 교체되면서 그나마 20년 가까이 투기 예방책으로 존재했던 '농지관리위원회' 자체가 사라졌다.

농림축산식품부 관계자는 "농지관리위원회는 주로 농지 전용 심사를 해왔는데, 당시 전용 심사가 원활하게 안 된다는 문제 제기가 있었다. 또 농지 취득 관련해선 위원 2명이 이를 확인하는 것 자체가 객관성이 떨어진다는 비판도 있었다"며 "규제 완화 차원에서 폐지됐다"고 말했다.

그래픽=김성기 기자
결국 2기 신도시 투기 사태로 교훈을 얻지 못하고 손 놓고 있었던 것이 'LH사태'를 낳았다는 지적이 나온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 김남근 변호사는 "이명박 정부 초기 FTA 문제도 있고 하면서 농업의 경쟁력을 위해 대농·전문농을 키운다며 비영농인들이 농지를 쉽게 가질 수 있도록 정책이 바뀌었다"며 "그렇다고 전문농이 키워진 것도 아니고, 오히려 땅 투기를 할 수 있는 길만 열어준 꼴이 됐다"고 지적했다.

이어 "지금이라도 신도시 투기 사태로 얻은 교훈을 토대로 적어도 경자유전의 원칙에 따라 영농을 할 목적으로 농지를 사는지, 투기 목적으로 사는지 엄격히 심사할 수 있는 심사위원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 김헌동 부동산건설개혁본부장 또한 "2기 신도시 당시 건교부 차관 등이 농지를 사서 투기한 것이 밝혀졌는데, 이후 처벌이 제대로 안 되니까 고위공직자는 물론 국회의원이나 심지어 대통령까지 농지를 사는 것"이라며 "개선책을 내놓으면 뭘 하나. 정작 법과 정책을 만들 공무원과 국회의원들이 농지를 사는데"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지금 서울에서 20평짜리 아파트를 사도 자금 출처를 조사하고, 대출은 아예 해주지 않는 등 강도 높은 규제를 하고 있다. 자기가 살 집을 사는데도 그러는데, 농사도 안 짓는 사람들이 농지를 사면 당연히 강력하게 처벌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편 최근 LH 사태 이후 정부와 국회는 뒤늦게나마 관련 제도 개선을 추진하고 있다. 각 시도읍면에 외부 위원 등으로 구성된 '농지위원회'를 만들어 농지 취득 시 이를 위원회에서 심의하도록 하는 것이 골자다.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