켜켜이 쌓인 시간과 기억들이 나를 만든다면, 그 모든 시간과 기억을 상실해 가는 과정은 어떤 두려움으로 다가올까. 심지어 내가 무엇을 잃어가는지조차 알지 못한 채, '나'라는 존재마저 잊어가는 과정의 혼란과 두려움을 영화 '더 파더'가 담아냈다.
'더 파더'(감독 플로리안 젤러)는 완벽하다고 믿었던 일상을 보내던 노인 안소니(안소니 홉킨스)의 기억에 혼란이 찾아오고, 완전했던 그의 세상을 의심하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다.
은퇴한 80대 노인 안소니는 자신만의 규칙과 방식으로 직접 가꿔 온 집에서 평온한 노후를 즐기고 있는 인물이다. 그러던 중 치매로 인해 기억이 조금씩 어긋나기 시작하고, 일상에 혼란과 불안을 겪게 된다. 하루하루 머릿속에서 시간과 사건, 주변 인물은 물론 심지어 자신을 돌봐주던 사랑하는 딸 앤의 얼굴조차 뒤죽박죽이 된다.
영화는 안소니의 기억 속에서 두서없이 섞이고 사라지며, 알고 있던 이들이 자신과 자신의 집을 노리는 침입자로 변하는 순간을 마치 스릴러 영화처럼 표현한다.
정확히는 모든 기억이 엉망으로 뒤엉킨 치매 환자가 마주하는 현실은 공포 그 자체일 것이다. 카메라는 진짜 현실과 안소니가 보고 기억하는 현실을 어지러이 오가며 관객들조차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이 어느 시점에 벌어진 일이며, 과연 진짜 앤과 주변 인물들의 모습이 맞는지 혼란스럽게 만든다. 그리고 관객이 봤던 것에 관해 의심하게 한다.
안소니는 공포를 느끼고, 그 공포는 그의 얼굴과 낯설어가는 집이라는 공간을 통해 드러난다. 영화는 치매에 걸린 노인이 점차 자신의 주변과 자신의 가족, 심지어 자신마저 잊어가는 슬픈 여정을 뒤쫓는다. 그 과정에서 안소니는 자신의 모든 것이 담긴 집이 점차 낯설게 자신을 죄어 오는 것을 느낀다.
카메라는 종종 집안 곳곳을 비추면서 편안해야 할 집이 어느 곳보다 낯설고 두려운 공간으로 변해가는 과정을 담아낸다. 같은 공간이지만 안소니의 기억이 점차 뒤섞이고 소실되는 과정에서 어쩐지 전혀 다른 장소처럼 보이기도 한다. '집'이라는 한정된 공간을 주요 무대로 삼는데, 안소니의 기억 자체가 한정된 시점과 사실 안에서 혼돈과 변주를 거듭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영화 속 집은 안소니의 머릿속과 심적인 혼란을 대변하는 또 다른 주인공이자, 안소니 그 자체이기도 하다. 이를 통해 우리는 안소니와 안소니의 내면세계 그리고 더 나아가 치매에 대해 더욱 깊숙하게 들어가 간접 체험하게 된다.
공간 외에도 눈에 띄는 점은 안소니가 계속 자신의 시계를 도둑맞았다고 이야기하는 대목이다.
시간을 알려주는 시계가 사라졌다고 하는 그의 말은, 물리적인 시간이 뒤엉킨 안소니의 상황은 물론 과거와 현재의 자신마저 사라져가는 체험적인 시간이자 한 명의 존재가 지금에 이르는 자신을 일궈온 경험들의 상실을 암시한다.
영화는 치매 환자의 혼란과 두려움뿐 아니라 그로 인한 주변인의 갈등과 아픔까지 두루 조명한다. 아버지 안소니를 바라보는 딸 앤 역시 안소니가 기억을 잃어감에 따라 점차 아버지와 자신의 삶 중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게 된다.
영화를 본 후 안소니와 앤을 떠올리며 우리들은 과연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지, 치매 환자에게 무엇이 최선일지 하는 개인적인 물음부터 시작해, 그렇다면 과연 사회는 어떻게 이들을 배려하고 보호할 수 있을지에 대한 물음으로까지 나아가게 된다.
때때로 안소니 홉킨스는 연극 무대 위의 주인공처럼 홀로 꽤나 긴 대사를 할 때가 있다. 안소니 인생의 주인공은 안소니 그 자체이듯, 그는 자신과 자신의 삶이 건재함을 이야기한다. 또한 안소니는 자신의 혼란스러움과 두려움을 긴긴 이야기를 통해 관객에게 보여준다.
특히 영화의 마지막, 안소니가 결국 과거로 돌아가 엄마를 부르짖으며 눈물 흘리는 장면은 혼란스러움에 빠져 있던 관객의 마음을 뒤흔든다.
안소니 홉킨스가 연기한 극 중 주인공의 이름이 '안소니'라는 점은 그의 열연과 어우러져 현실의 관객에게 더욱 극적으로 다가온다. 한 시대를 풍미한 노배우의 지금과 겹쳐지며 더더욱 처연한 감정을 만들고, 극 중 인물에 더욱 감정 이입하게끔 한다.
97분 상영, 4월 7일 개봉, 12세 관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