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차(BEV)를 차세대 주력산업으로 끌어올린 1등 공신이 미국 '테슬라'라면, 현재 가장 뜨거운 전기차 시장은 유럽이다. 유럽의 강력한 환경 규제가 완성차 시장을 전기차 위주로 재편할 것을 강제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럽의 브랜드들은 전기차의 배터리에 있어선 미국과는 다른 길을 가고 있다. 미국에선 테슬라가 원통형 배터리를 쓰는 반면, GM과 포드는 파우치형을 쓴다. 반면 유럽 브랜드들은 원통형을 쓰지 않고, 각형과 파우치형을 주로 사용한다.
유럽 브랜드는 각형과 파우치에서 엇갈리는데, 메르세데스 벤츠와 BMW, 포르쉐, 아우디 등은 각형을 쓰는 반면, 볼보와 르노 등은 파우치 위주이다. 이런 가운데 폭스바겐이 '각형'을 선언하면서 이차전지의 표준을 각형 위주로 가는 것 아니냐는 전망이 제기됐다.
글로벌 시장점유율 1위인 우리나라 입장에선 도전이 아닐 수 없다. 한국 배터리 업체들은 LG에너지솔루션이 파우치와 원통형을, 삼성SDI가 각형을, SK이노베이션이 파우치형을 각각 주력으로 생산 중이다.
기술 표준이 각형 위주로 전개된다고 단정 지을 수 없지만, 일본을 위주로 한 전고체 배터리의 개발 등 기술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자칫 흐름을 놓칠 경우 도태될 수 있다.
BMW는 지난 17일(현지시간) 뮌헨에서 전기차에 주력하겠다는 '미래 기업 전략'을 발표하며, 새로운 순수전기차(BEV) 세단인 'i4'를 공개했다.
BMW의 계획은 올해 '전기화 모델(xEV)'의 판매량을 전년 대비 75% 이상 확대하고, 2023년까지 총 13가지 순수 전기 모델을 새롭게 출시하며, 2025년 말까지 누적 200만대 이상의 순수전기차를 판매한다는 것이다. 200만대는 지난해 기준 BMW 글로벌 판매량의 대부분에 해당하는 수치이다.
사실 BMW는 전동화 부분에서 선도적인 위치는 아니라는 것이 현재까지의 평가였다. 현대차의 E-GMP와 같은 순수전기차 전용 플랫폼도 갖고 있지 않다.
하지만 이날 공개된 i4의 스펙은 예상보다 뛰어났다. 3시리즈 플랫폼을 기반으로 80kWh 용량의 배터리가 탑재된 i4는 항속거리가 590km(WLTP기준)에 달하고, 530마력의 최대출력으로 정지상태에서 시속 100km까지 가속시간은 4초를 기록한다.
3시리즈의 상품성은 익히 알려진 바와 같다. i4가 비록 전용 플랫폼 차량은 아니지만, 항속거리가 길고, 출력 등 '고성능' 분야에서 내연기관 기준, M퍼포먼스(M340i‧M440i)보다 뛰어나고 M3‧M4에 버금하는 수준이다. 자동차 전문 외신 '카앤드라이브'는 i4에 대해 "테슬라 모델3, 아우디 이트론 GT 등과 경쟁하게 될 것"이라며 이날 공개된 제원상의 수치보다 뛰어난 성능이 기대된다고 보도했다.
BMW 베스트셀러인 3시리즈의 전기차 버전에는 '각형' 배터리가 탑재된다. 삼성SDI와 중국의 CATL 배터리가 쓰일 것으로 알려졌다.
BMW보다 앞서 지난 15일 파워데이 행사를 개최한 폭스바겐은 배터리 표준을 각형으로 쓰겠다고 해서 충격을 줬다. 폭스바겐의 발표 내용은 배터리에 초점을 둔 것이다.
폭스바겐 측은 "각형 통합 셀(prismatic unified cell)은 그룹이 향후 5년 안에 배터리 기술 측면에서 비약적인 도약을 보일 것이라고 전망하는 차세대 전고체 셀(solid state cell)로의 전환을 위해 필요한 최적의 조건을 제공할 것"이라고 밝혔다.
각형을 통합 셀의 기본으로 독자 제작을 시작해 전고체 배터리를 개발, 제작하겠다는 얘기다. 단기적으로 각형 위주인 중국시장을 활용하는 전략인데, 장기적으론 유럽에서 배터리를 생산해 조달, 체계를 단순화하고 비용을 절감한다는 계획인 셈이다.
현재 우리나라 완성차 업체의 경우 LG에너지솔루션과 SK이노베이션, 삼성SDI 등을 통해 배터리 공급을 보다 손쉽게 받고 있다. 이들 배터리 3사들도 유럽에서의 폭발적인 수요 증가를 미리 예측, 폴란드와 헝가리 등 동유럽에 배터리 공장을 갖고 있거나 증설 중이다.
◇왜 각형을 많이 채택하나…배터리 표준 장‧단점
그렇다면 유럽의 프리미엄 브랜드들이 각형을, 테슬라는 원통형을, 현대차‧기아는 파우치를 선호하는 이유는 뭘까.
배터리 형태에 따라 장‧단점이 있기 때문에 각 회사들이 추구하는 완성차의 성향에 따라 배터리 형상도 달라진다.
폭스바겐‧BMW 등의 발표가 있기 전까지만 해도 각형은 파우치에 비해 뒤떨어진 기술로 평가됐었다. 파우치에 비해 무게가 무겁고 형태 변경이 어려우며, 자리를 많이 차지해 에너지 밀도를 높이기가 어렵다. 그러나 대량 생산에 용이한 장점이 있고, 무엇보다 내구성이 좋아 안정적인 것이 가장 큰 장점이다.
테슬라가 '배터리데이'를 통해 내재화를 선언한 것은 원통형이다. 이날 '4680' 계획이 공개됐는데, 원통형 배터리의 지름을 46mm, 길이를 80mm로 각각 늘려 기존 '2170' 규격에 비해 에너지밀도를 5배 이상 끌어올리겠다는 것이 테슬라의 목표이다.
테슬라가 새 배터리에 집착하는 이유는 원통형 자체도 설계상의 어려움 때문에 에너지 밀도가 낮기 때문이다. 이밖에 저렴한 비용, 높은 안정성에 비해 수명이 짧은 단점이 있다.
우리나라의 주력 배터리 표준이라고 할 수 있는 파우치형은 납작한 형태로 돼 있어 에너지 밀도를 높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각 회사들의 개별 플랫폼에 적용하기 것도 큰 장점이다. 하지만 코나 사태에서 보듯 내구성에 약점이 있다. 무엇보다 화재로 이어질 경우 치명적이다.
최근 LG에너지솔루션과 SK이노베이션이 미국 국제무역위원회(ITC)에서 '영업비밀'과 '특허 침해' 문제로 다투고 있는 배터리 기술이 파우치형에 해당한다. 미국 조지아주에서 생산될 폭스바겐 물량이 파우치형인데, 두 회사 중 하나만 살아남을 경우 납품선 다양화를 원하는 완성차 업체 입장에선 파우치형을 더욱 기피하게 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