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다한 사람들이 복음의 빛 안에서 희망을 찾았습니다. 그땐, 아무도 조목사님을 기복주의자라고 비난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시대가 변했습니다. 한국 사회는 잘 살아 보자는 욕구를 넘어서서 바르게 사는 길을 찾는 데 목말라 했습니다
교회가 그 요구의 절실함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교회는 잘 믿으면 더 큰 부자가 된다고 계속 충동했습니다. 이것이 그 많은 기도원 운동의 주된 흐름이었습니다.
복음의 본질은 퇴색되고교회가 전한 복음은 기복주의라고 정죄 받았습니다.
기복주의는 물질만능주의의 다른 이름입니다. 기복주의는 산업화 과정에서 조성된 물질만능주의와 짝을 이루면서 어느새 보수적교회는 보수적 정치세력과 한 배를 탔습니다.
보수를 자처한 극단적 개신교집단과 보수를 표방한 극우정치 집단이 혼합되어 괴물화 된 것이 바로 전광훈 현상입니다.
코로나19에 대한 국가의 정당한 방역을 신앙의 이름으로 조롱하고 나선 최초의 집단이 바로 전광훈 집단이었습니다.
일부 개신교 지도자들이 코로나 방역에 대한 비난을 이어가면서 한국교회의 공공성에 대한 신뢰도는 바닥을 헤매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전광훈과 다르다고 외쳤지만 불행하게도 일반 국민들은 개신교와 전광훈 신천지 인터콥 IM선교회를 구별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해야 세상이 교회가 전한 복음에 다시 귀를 기울이게 될까요?
첫째, 복음을 전할 때 종교적 언어가 아닌 성경적 가치 언어로 다가가야 합니다.
이것은 복음의 유일성을 상대화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속적 이원론을 극복해야만 가능한 성경적 세계관에 입각한 것입니다.
평화, 정의, 인애…이러한 언어는 성경의 중심 가치입니다. 예수의 심장으로 전하면 복음의 알갱이가 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있는 곳에 평화, 정의, 인애가 확장되어 가면 그 때 비로소 세상은 교회의 증거에 귀를 기울이게 될 것입니다.
둘째, 이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과제이지만 특별히 목사님들이 먼저 수행해야 할 특별한 미션입니다. 목사님들이 더 가난해져야 합니다.
세상이 깜짝 놀랄 정도로 목사님들의 일상이 더 검소해져야 교회가 신뢰를 회복합니다.
저도 최근에 아프고 고통스러운 체험을 통해 저를 향한 주님의 뜻을 새롭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저는 목회에서 은퇴한 후 저의 생활 기준을 품위를 유지하는 것이다고 생각했지만 주님은 저에게 가난한 삶을 원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목사님들이 가난해지지 않고는 설교에 책임을 질 수 없습니다.
셋째, 교회는 세상을 향한 대안공동체라는 것이 하나님나라를 갈망하는 모든 이들의 신학적 상식이 되었습니다. 복음적 삶은 결코 혼자 살아낼 수 없습니다.
'너희가 세상의 소금이요, 빛이다'는 주님의 말씀은 결코 개인윤리가 아니라 교회가 성취해야 할 공동체적 과제입니다.
지금, 여기 있는 교회는 장차 완성될 하나님나라의 모델 하우스입니다.
교회가 부족하다는 것을 가장 먼저 아신 분은 우리 주님이셨습니다. 오늘도 주님은 교회가 당신의 형상을 이루어 가도록 해산의 고통을 당하고 계십니다.
교회가 교회답지 못한 것 때문에 교회를 떠난 소위 가나안성도가 되는 것은 해답이 아닙니다. 오죽하면 가나안성도가 되었겠습니까마는 길이 아니면 가서는 안됩니다.
CBS논평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