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안군 '염전노예' 사건의 피해자가 제기한 국가배상소송과 관련해 법원이 또 한 번 '제식구 감싸기' 판결을 했다는 비판이 커지고 있다. 소송을 당한 판사(피고) 측이 주장하지 않은 내용을 재판부가 대신 언급하거나 증인신문도 없이 당시 상황을 추정·평가한 대목이 판결문 곳곳에 많기 때문이다.
피고 측이 같은 판사가 아니라 다른 공무원이었다면, 재판부가 이같은 서술을 할 수 있었을지 의문이 제기된다.
◇판사 사정은 판사가 안다?…추단(推斷) 문장 가득한 판결
서울중앙지법 민사항소8-2부(이순형·김정민·김병룡 부장판사)는 지난 16일 염전노예 사건 피해자 A씨가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청구 소송의 항소심에서 A씨의 항소를 기각하고 1심과 마찬가지로 패소 결정을 내렸다.
이번 소송은 법관이 재판 중 저지른 잘못에 대한 책임을 묻기 위한 것이다. 지적장애 2급인 A씨를 13년간 노예처럼 부린 가해자 측이 A씨의 보호자가 없는 사이 찾아와 '처벌불원서'를 받아갔는데, 당시 재판부(광주지법 목포지원 형사1부)가 아무런 검증 없이 이를 받아들여 가해자를 감형시켜준 문제가 있었다.
3년간의 2심 진행 과정에서 피고(광주고법 소송수행 담당 공무원) 측이 제출한 답변서는 2건에 불과했다. 합쳐서 4페이지 분량으로, 중요 서술 내용만 따지면 10줄이 채 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판결문에는 "당시 재판부가 시간상·상황상의 제약으로 원고(A씨)의 진의를 직접 확인하기 어려워 제출된 처벌불원서의 기재만 보고 확인한 것으로 보인다"는 등의 추단하는 내용이 상당수 담겼다.
당시 재판부가 다른 재판 일정으로 바빴다거나, 가해자의 구속기한 만료가 다가와 변론을 재개하기 어려웠던 사정 등은 피고 측이 주장한 적 없는 내용이다. 같은 판사 입장이 아니라 다른 공무원이 피고였다면, 사실관계 조사 없이 쉽게 판단하기 어려운 부분일 수 있다.
최 변호사는 "해당 판사들을 증인으로 불러 그들이 법정에서 어떤 사정이 있었다고 해명했다면 패소하더라도 납득했을 것"이라며 "판결문을 보고 재판부가 피고(법원) 측 변호사처럼 느껴졌다"고 지적했다.
특히 문제의 재판부에 손해배상 책임이 없다는 결론을 뒷받침하기 위해 다소 무리한 논리 전개가 포함되기도 했다.
당초 목포지원 형사1부에서 처벌불원서를 검증하지 못한 잘못은 이후 광주고법 2심에서 한 차례 바로잡은 바 있다. '당심(2심)에 이르도록 가해자가 피해자와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며 문제의 처벌불원서 효력을 부정한 것이다. 이는 A씨 측이 목포지원 형사1부 판사들의 책임을 묻는 근거 중 하나였다.
그런데 민사항소8-2부는 이번 판결문에서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고 판단했을 뿐, 처벌불원 의사 유무는 아무런 판단을 하지 않은 것"이라고 의미를 축소했다. 광주고법의 처벌불원서 배척이 곧 목포지원 형사1부의 실책을 방증하는 것은 아니라는 취지다.
이에 대해 재경지법의 한 부장판사는 "형사소송에서는 피해자가 가해자를 처벌하지 말아달라는 '처벌불원'이 당사자간 합의로 간주된다"며 "실무적으로 두 개념을 달리 보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합의 불발'과 '처벌불원'을 나눈 이번 판결의 논리가 부자연스럽다는 것이다.
변론 종결 후라도 중요한 증거·참고자료가 제출된다면, 판사가 변론을 재개하거나 검사 측에 의견을 물어 선고를 연기하는 등의 조치를 취하는 관행과 배치되는 내용이다.
판사 출신의 한 변호사는 "피고인이 일부러 변론종결 후에 피해자 동의 없이 날조한 처벌불원서를 제출하면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있다는 것으로도 비춰질 수 있다"며 "다소 무책임한 원칙론으로 보인다"고 꼬집었다.
판사에게 재판 과정에서의 잘못을 묻기 어려운 것은 물론이고, 그러한 문제제기를 사회적 약자가 했을 때 더욱 피해를 인정받기 힘든 현실이 드러났다는 비판도 나온다.
최 변호사는 "재판부는 'A씨가 잘못된 재판으로 인해 실제로 정신적 고통을 당했다고 볼 증거가 없고 일반인의 경험칙으로도 납득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썼다"며 "지적장애인에 대한 차별적인 인식이 드러난 대목으로 보여 가슴이 아프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