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부과학', 데이비드 마이클스-
'가습기살균제 참사'는 지난 2011년 공론화된 이후 올해 만으로 꼭 10년이 됐지만, 진상규명과 책임자들에 대한 처벌은 여전히 미완(未完)이다. 특히 지난달 12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3부(유영근 부장판사)가 가습기살균제를 제조·판매한 SK케미칼와 애경산업 등에 대해 '무죄'를 선고한 1심 판결을 향한 논란은 지금도 잦아들지 않고 있다.
환경보건시민센터는 17일 환경·보건 전문가들이 모인 대한예방의학회, 대한직업환경의학회, 한국역학회, 한국환경법학회, 한국환경보건학회, 환경독성보건학회 등 6개 학회와 공동으로 해당 판결의 문제점을 톺아보는 포럼을 서울대 보건대학원에서 개최했다. 이번 행사에선 판결 관련 법리적 검토와 함께 독성학적·역학적 측면에서의 의견 제시, 향후 개선방안에 대한 논의가 이뤄졌다.
첫 발제를 맡은 강원대 법학전문대학원 박태현 교수는 미국의 환경·보건 전문가인 데이미드 마이클스 조지워싱턴대 교수의 저서 한 대목을 인용하며 "가습기살균제 사건처럼 다양한 환경·보건 증거들이 제출되고, 그에 기반해 재판이 이뤄졌음에도 연구자와 재판부의 증거 해석이 이토록 극명하게 갈렸던 재판은 거의 전례가 없지 않나 생각한다"고 밝혔다.
단적으로 CMIT·MIT의 폐섬유화 유발 가능성을 실험한 기존 연구가 흡입노출이 아닌 기도 내 점적 실험으로 이뤄졌다는 점을 들어 유해성을 입증한 증거로 보지 않은 점, 실험 당시 농도를 비현실적으로 높이는 등 '연구자의 편향이 개입될 여지가 있다'고 바라본 점 등을 들었다.
박 교수는 "과학의 진실 추구 방법에는 불가피하게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고, 따라서 그 결과는 제한적인 것이다. 방법론상 한계가 없는, 이른바 무결점의 과학연구에 의한 결과만으로 '합리적 의심의 여지가 없는' 확실성이 있어야만 공소사실의 진정성을 인정할 수 있다고 한다면 사실로 인정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다"고 비판했다.
판사로 재직했던 오지원 변호사는 "방대한 사건일수록 판사는 법정에서 심증을 형성하게 되고, 배석판사들이 기록을 보고 그 근거가 '맞는다', '안맞는다'를 이야기하게 된다. 구조적으로 불리한 상황이긴 했다"며 "공동 피고인이 많은 데다 과학이 나오는 순간 판사들은 매우 위축되기 때문인데, '연구진의 편향'이란 표현도 거기서 비롯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검찰이 기존 판례를 꼼꼼히 살피고 '공격적 주장'을 펼치는 데 실패한 부분도 패인이라고 분석했다.
가해기업을 처벌하지 않음으로써 빚어질 수 있는 사회적 영향에 대한 고민이 없어 보인다는 점도 지적했다.
이어 "무엇보다 현재 안전한 제품을 출시하기 위해 많은 비용을 들여 실험을 거치는 기업인들에게 매우 부정적이고 안일한 시그널을 줄 수 있다. 즉, 국가가 사후에 위해성을 단정할 수 있을 정도로 과학적·의학적 입증을 하지 못하는 이상 처벌되지 않고 손해배상을 할 일도 없다고 받아들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이라고 우려했다.
앞서 법정에 수차례 출석했던 안전성평가연구소의 이규홍 박사 역시 "흡입노출보다 과장된 결과가 나올 수 있다고 하지만, 기도 내 점적 투여 방식으로 얻을 수 있는 독성작용은 그 (실험)방식 때문이 아니라, 물질이 갖고 있는 독성 특성에 따른 결과인 것"이라며 "CMIT·MIT에 의해 폐손상이 나타난다는 증거는 충분히 제시됐다고 생각한다"고 안타까움을 나타냈다.
항소심에서 다른 결과를 이끌어내기 위한 개선책들도 제시됐다.
박 교수는 "형사소송법 제279조의2에서는 전문심리위원을 지정할 수 있다. 최근 재판부가 삼성 준법감시위원회가 실효적 운영기준에 미달한다고 본 판단에는 이를 평가한 전문심리위원들의 평가보고서가 결정적 역할을 했다"며 "2심에선 '과학자 자문 패널'을 구성해 과학적 연구결과에 대한 패널의 종합적 의견을 재판에 반영할 필요가 있다"고 제언했다.
피해자들을 대리하고 있는 황정화 변호사는 "기존 연구들을 과학적 관점에서 어떻게 새로이 구성할 것인가를 고려하는 새로운 평가가 필요하다. 후속 연구를 새로운 보완 증거로 제출하는 것 또한 필요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