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대법원장이 정치권의 눈치를 보며 수동적 사법개혁 행보를 했다는 지적에 대해선 대체로 실망하는 기류지만, 조직적으로 사퇴 목소리를 낼 경우 자칫 법원 전체가 반(反)탄핵·개혁 세력으로 비춰질 수 있다는 고민도 작용하는 모양새다.
12일 법조계에 따르면 법원 내부망 코트넷 게시판에는 이번 임 부장판사 녹취록 파문과 관련해 정욱도 대구지법 부장판사가 쓴 1건의 글만 올라와 있다. 윤종구 서울고법 부장판사도 앞서 글을 올렸지만 스스로 삭제한 것으로 보인다. 두 글은 각각 다른 지점에서 김 대법원장을 비판하는 내용이지만 사퇴나 강도 높은 책임을 직접 거론하진 않았다.
재경지법의 한 부장판사는 "임 부장판사와 연배가 비슷한 고법 부장들은 야당과 마찬가지로 사표 반려 자체를 문제 삼고 있지만, 대부분의 판사들은 생각이 다를 것"이라며 "대법원장이 사법개혁 의지가 전혀 없었고 눈치보기에 급급했다는 점에 실망했다"고 말했다.
전국법관대표회의가 직접 사법농단 비위법관 탄핵을 국회에 요구한 바 있는데, 대법원장의 내심은 달랐다는 것이 드러난 셈이다.
한 일선 법원 판사는 "사법농단 사태를 법원이 자체적으로 해결하지 못하고 검찰 손에 맡기면서 여러 문제들이 예상됐지만 법원의 반성에 우선 공감했기에 받아들였던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검찰 수사는 수용해놓고 비위법관 징계는 어설프게 했다"며 "녹취록을 보고 대법원장이 개혁과 반성의 의지가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외부에서 자신이 비판받지 않을 정도의 선택만 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다만 대법원장에 대한 비판과 실망감이 공개적으로 표출되지 않는 것은, 임 부장판사의 사표를 반려한 행위나 최근 탄핵소추까지 부당한 것으로 오해될 수 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징계나 수사 대상이 된 공무원의 사표를 수리하지 않는 것처럼, 탄핵 논의가 오가던 임 부장판사의 사표를 받지 않은 것을 문제 삼긴 어렵다는 분위기다. 사법농단 사태 당시 '재판개입'이라는 중대한 위헌적 행위에 대해 매우 이례적으로 법관들이 의견을 냈을 뿐, 현재 상황에선 국회의 탄핵소추와 헌법재판소의 심판 진행을 존중해야 한다는 입장도 적지 않다.
김 대법원장이 사퇴한다면 내년 임기가 끝나는 문재인 대통령이 대법원장을 한 번 더 임명하게 된다는 점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이다. 한 현직 판사는 "대법원장이 바뀐다고 해서 현재 기조에 변화가 생길지 의문"이라며 "현재로선 대법원장이 좀 더 분명하게 사과하고 당시 탄핵 관련 발언에 대해 해명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말했다.
올해 정기인사에서 김 대법원장이 특정 고위법관들에게 사직을 종용하고, 일부 재판부는 통상적인 인사 기준에서 벗어나 '코드인사'를 했다는 의혹도 제기되고 있다. 자신에게 우호적인 법관들을 법원행정처 요직에 발령 내고, 중요사건을 맡은 재판부를 수년간 바꾸지 않는 식의 인사를 했다는 것이다.
고등법원의 한 부장판사는 "김 대법원장 취임 이후 소위 법원 내부 '주류 세력 교체'를 목표로 하는 인사가 계속 이뤄져 왔다"며 "강한 인사권을 휘두르는 대법원장의 모습은 전과 달라진 게 없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