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작 음악극 '명색이 아프레걸'은 한국 최초의 여성 영화감독 박남옥(1923~2017)의 삶을 조명한다. '아프레걸(apres-girl)'은 6.25전쟁 이후 등장한 새로운 여성상을 뜻하는 단어로, 박남옥의 인생 궤적에 맞춤한 듯하다.
이 작품은 박남옥의 성공 스토리가 아니다. 그저 학창시절 못 말리는 '영화덕후'였던 박남옥이 영화 '미망인'을 촬영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보여줄 뿐이다.
박남옥은 갓 태어난 딸을 맡길 곳이 없어 등에 업은 채 촬영장을 누비고 제작비를 아끼기 위해 배우·스태프의 밥을 손수 차리며 미망인을 완성한다. 그러나 영화는 개봉 사흘 만에 막을 내리고, 가정에 소홀했다는 이유로 이혼 통보까지 받는다.
미망인은 박남옥의 처음이자 마지막 영화가 됐다. 하지만 영화감독으로서 커리어를 쌓지 못했다고 그의 인생이 불행하거나 실패했다고 단정지을 수 없다. 영화에 대한 열정을 아낌없이 쏟아붓고, 곳곳의 난관을 극복하며 나아가는 그의 삶은 오히려 부러워할 만한 것이었다. 실제 박남옥의 도전적인 행보는 여성 영화감독 등장의 시발점이 되기도 했다.
이 작품은 박남옥의 삶과 영화 '미망인' 속 시공간을 넘나들며 이야기를 전개한다. 무대는 2단으로 이뤄졌는데, 윗쪽에서는 박남옥이 지나온 삶, 아래쪽에서는 영화 '미망인'을 촬영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극중극인 미망인 속 주인공 '신'의 삶은 박남옥의 인생과 겹친다. 신은 한국전쟁으로 남편을 잃고 어린 딸과 산다. 하지만 '불쌍한 여인'이 아닌 '전쟁통에서도 살아남은 강인한 여인'이라는 프레임 속에 있다. 새로운 사랑을 찾는데 적극적이고, 실연의 상처에도 꿋꿋하다.
박남옥의 손을 잡아주는 주변 여인들 역시 눈물바람하지 않는다. 대신 '명색이 아프레걸이라면'이라는 노래를 부르며 그를 응원한다. 그 순간 관객들도 너나 할 것 없이 박자에 맞춰 손뼉을 쳤다.
명색이 아프레걸은 국립극장 3개 전속단체(국립창극단·국립무용단·국립국악관현악단)가 10년 만에 한 무대에 올라 만든 작품이다. 한과 흥이 서린 소리꾼의 목소리, 우아하고 활기찬 무용수의 몸짓, 마음을 후벼파는 국악기의 소리가 잘 짜여진 직물같다.
이 작품은 당초 지난해 12월 개막할 예정이었지만 코로나19 3차 유행으로 개막을 늦춰 지난 20~24일 단 5일간 공연했다. 여성 아닌 인간 박남옥의 단단한 삶을, 꿈을 이루기 위해 박남옥이 흘린 피·땀·눈물의 가치를 더 많은 관객이 느끼지 못해 아쉬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