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권 사각지대 영화인…"열에 여덟 건강검진 못 받아"

영화 노동자들, 직장건강보험 가입에도 78%가 건강검진 받지 못해
장시간·밤샘 노동 등 주 52시간 초과에 불안·우울도 증가
1년 미만 고용되는 '단속적 노동자' 대부분…건강 사각지대에 놓여 보호받지 못해
영화노조 "법 개정 등 제도 보완 마련 필요"
영화 노동자의 건강권, 안전에서 건강 유지·증진으로 확장돼야
"법적 근거 마련된다면 영진위도 지원활동에 나설 것 제안"

영화 촬영 현장 모습. 해당 사진은 기사 내용과는 무관합니다. 영화사집 제공
"건강검진 등 복지 관련 제도가 있다는 것을 제작자도 노동자도 다 모르는 것 같아요. 안다고 해도 노동조합원들도 마찬가지로 회사에 무언가를 요구하는 건 꽤 꺼려져요. 제작사와 한 번 작품을 하면 적게는 3개월 많게는 1년 정도 일을 하게 되는데, 그다음에도 그 제작사와 일을 안 할 거라는 보장이 없어서 제작사 눈치를 많이 보는 것 같아요." _연출부서, P 조감독

영화 제작기간 프로젝트 단위로 고용되는 단속적 노동자(끊어졌다 이어지기를 반복하는, 휴게·대기 시간이 많은 업무에 종사하는 노동자)라는 이유로 많은 영화 스태프들이 '건강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현장에서는 이들을 위한 건강검진 제도가 마련돼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영화산업노동조합 제공
◇ 직장건강보험 가입에도 건강검진 못 받는 영화 노동자들

영화산업노동조합(이하 영화노조)이 지난 11일 발표한 '2020 영화 스태프 등 단속적 노동자의 건강검진 지원제도 마련을 위한 연구보고서'에서 204명의 영화 현장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설문을 한 결과, 제작사에 고용돼 직장건강보험으로 가입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78%가 건강검진을 받지 못했다고 응답했다.

또한 산업안전보건법에서 야간노동이 많은 경우 사업주가 특수건강진단을 실시하도록 하고 있고, 야간작업 특수건강검진 대상에 해당하는 노동자가 44.9%에 달했음에도 10명 중 9명이 특수건강검진에 대해 안내받지 못했다.

근골격계 질환에 대한 증상 빈도와 통증 조사에서도 62.7%의 응답자가 '통증 정도가 중간 이상인 경우'에 해당했다. 치료 대상자로 간주하는 '통증 정도가 심함 이상이면서 지난 1주일 동안에 증상이 있었던 경우'에 해당하는 사람도 27%나 됐다.

정신 건강에서도 우려스러운 지점이 통계로 확인됐다. 설문에 응답한 영화 노동자들의 평균 범불안장애 척도-7(GAD-7)는 4.86점으로 나타났으며, 응답자 10명 중 4명은 5점 이상에 달했다. 5점 이상인 경우 경도의 불안 또는 불안장애 의심으로 판단한다.

장시간 노동과 잦은 야근으로 근무시간이 주 52시간을 초과하며 불안 증상을 겪는 영화 노동자들 역시 다수 조사됐다. 매주 주 52시간을 초과한다고 응답한 그룹의 59.1%가 불안 증상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우울척도(CES-D) 역시 '우울 증상 있음'으로 구분하는 21점 이상을 기록한 응답자가 18.6%, 매주 노동시간 52시간을 초과한다고 응답한 그룹에서는 무려 31.8%가 우울 증상이 있는 것으로 집계됐다.

영화산업노동조합 제공
◇ 영화 스태프 대부분 '단속적 노동자'…"건강검진 있는 줄 몰라"


영화노조는 "산업안전보건법에서는 사업주의 의무로 건강검진을 시행하도록 하고 있음에도 연 단위로 주기를 정하고 있어 영화산업 노동자와 같이 1년 미만 단기간 고용된 노동자에겐 해당하지 않아 노동자 건강권 보호의 사각지대가 존재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영화진흥위원회가 발간한 '2018년 영화 스태프 근로환경 실태조사'에 따르면 1개 작품의 평균 근무 기간이 4.8개월로, 대부분 스태프의 계약 기간은 1개월~6개월 미만인 것으로 나타났다. 표준근로계약서상으로도 1년간 참여 작품 수는 평균 2.18편이었으며, 한 작품당 평균 근무기간은 평균 4.7개월로 조사됐다.

이처럼 대다수가 영화 제작기간에 프로젝트 단위로 일을 하는 단속적 노동자라 산업안전보건법에 따라 건강검진을 받는 게 쉽지 않다.

촬영부서에 있는 한 팀장은 "내가 봤을 때 밤낮이 바뀌는 등 일의 강도가 높다는 생각이 든다"며 "그런데 아무래도 프로젝트 성으로 하다 보니, 계약을 하면 3~5개월 사이로 한다. 1년이 안 돼서 그런지 건강검진 받으라는 소리를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제작부서에서 일하는 팀장 역시 "4대 보험이 되는 정규 영화를 4~5년 쉬지 않고 했지만 단 한 번도 그런 안내를 받은 적이 없다. 영화사를 통해서 건강검진을 받은 적도 한 번도 없다"며 "제작사에서 그거 말고도 신경 쓸 게 많다. 솔직히 이야기하면 귀찮아서 안 하는 것 같은데, 이런 게 있는지도 모르는 것도 같다"고 이야기했다.

영화산업노동조합 제공
◇ 법 개정 등 제도 마련 시급…"영진위, 지원 활동 나서달라"

영화노조는 "일하는 현장에서 노동자가 다치는 일 등이 발생하지 않기 위해서는 예방은 물론 노동자의 건강권 보장에 대한 책임을 갖고 의무를 다해야 한다. 짧게 고용되는 노동자라고 해서 예외가 되어선 안 된다"고 지적했다. 이를 위해 영화노조는 법 개정 등 제도적인 보완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영화노조는 "산업안전보건법 시행규칙 제197조의 '사업주의 일반건강검진 실시의 노력' 항목에 반복 단기계약 업종에 대한 내용을 추가해 제도적으로 명시해야 한다"며 "'영화 및 비디오물의 진흥에 관한 법률'에서도 안전에서 건강의 유지·증진으로 확장으로 법적 보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와 같은 법 개정에 따라 영화산업 근로표준계약서도 개정해 영화 노동자들의 건강권을 확보할 필요도 있다고 주장했다. 영화 산업 내 사업주와 노동자에게 관련 내용에 대한 인식을 높이고, 이를 통해 실제 건강진단 실시율이 높아져야 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영화노조는 "법적 보완으로 더 넓은 의미의 업무상 재해로부터 영화 근로자를 보호하고, 영화근로자의 건강을 증진하기 위한 적절한 조치를 할 의무가 영화업자에게 부여돼야 한다"며 "국가가 지원 활동에 나설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된다면 영화진흥위원회에서 건강검진과 관련된 지원 활동을 할 것을 제안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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