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재가 '다만 악' 레이를 쫓고 또 쫓은 사연

[노컷 인터뷰] 쫓는 자 '레이', 그에 관한 뒷이야기
영화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레이역 배우 이정재

(사진=CJ엔터테인먼트 제공)
※ 스포일러 주의

레이(이정재)는 쫓는 자다. 자신의 형제가 인남(황정민)에게 암살당한 사실을 알게 되며 인남을 쫓기 시작한다. 그를 죽이기 위해서다.

레이는 인남에게 복수하고 최종적으로는 그를 죽이겠다는 일념으로 일본 한국 태국으로 이동한다. 그곳에서 레이는 인남과 관련된 인물을 잔혹하게 죽인다. 겉으로는 화려한 색을 가진 레이이지만, 사람을 무자비하게 죽이는 그의 내면은 무채색에 가깝다.

레이는 살해 대상을 눈앞에 두고 아무렇지 않게 아이스커피를 마신다. 살해 행위와 일상 사이 경계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 레이의 눈빛은 공허하다. 형제의 복수를 위한다지만 복수는 핑계일 뿐, 그를 부르는 또 다른 이름 '백정'처럼 그저 난도질할 대상이 필요했을 뿐이다.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감독 홍원찬) 속 레이를 누구보다 강렬하게 스크린 위에 구현한 배우 이정재를 최근 서울 종로구 삼청동 한 카페에서 만났다. 레이의 모든 것에 이정재의 손길이 닿아 있었다.

(사진=CJ엔터테인먼트 제공)
◇ 무심한 듯 서늘한 추격자 '레이'

"절대 건드리지 마, 그놈은 내 거니까"라는 대사에서도 느껴지듯이 레이는 한 번 정한 타깃은 절대 놓치지 않는 집요한 추격자다. 영화는 많은 설명 대신 상황과 레이의 대사, 모습을 통해 그가 어떤 인물인지 말한다.


"레이라는 인물을 설명해주는 이야기들이 많이 없다 보니 제 상상력이 더 많이 투영됐어요. 그래서 관객분들이 레이의 모습을 보면 왠지 그냥 다 이해가 돼야 했죠. 저도 부연 설명 없는 캐릭터라 조금은 도전이기도 했어요. 레이를 잘 그려낸다면 캐릭터를 구현하는 다른 방법, 다른 시도에 대한 성과가 있지 않을까 생각했죠."

레이가 가진 기본적인 속성이 '추격자'인 만큼 상대에게 공포심을 안겨줘야 했다. 그 공포심은 곧 추격 액션의 핵심 중 하나인 긴장감으로 이어진다.

"그냥 한 번 쓱 지나갈 때, 가만히 있을 때 느껴지는 공포심이 있어야 하죠. 작은 곳에서도 찰나에 서늘함과 공포를 느끼게 해야 하는데, 그런 것들을 어느 시점에서 보여줄 것인지 아주 유심하게 체크를 해야 하죠. 무심한 듯 날카롭게 보이기 위해서는 작은 디테일을 계속 챙겨야 하고, 이를 위해 혼자서 계속 인물에 집중하는 수밖에 없었죠."

(사진=CJ엔터테인먼트 제공)
무심한 듯 섬뜩한 레이를 그려내기 위해 챙긴 디테일 중 하나가 바로 독특한 스타일이다. 흰색을 기본으로 화려한 패턴이 수놓아진 의상, 목덜미까지 뒤덮은 문신은 화려하게 상대를 위협하는 분위기를 뿜어낸다. 특히 회색빛이 감도는 형제의 장례식장, 흰 롱코트를 입고 등장한 레이의 모습은 이질적이다.

"독특한 면이 더 돋보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죠. 예를 들어 저는 사실 형제의 죽음이 레이에게 그다지 큰일이 아니라고 봤어요. 내 주변의 무언가를 건드린 것은 곧 나를 건든 것과 마찬가지라는 인식인 거죠. 또 레이는 당장 누군가를 사냥하고 싶은데, 사냥하러 떠날 이유가 생긴 거죠. 장례식장에서 흰 코트 입은 것도 아주 정중한 마음의 표현이 아니었던 거예요."

이정재는 레이라면 어떤 비주얼과 어떤 행동으로 사람을 대하고 제압할까 생각의 꼬리를 물며 파고들었다. 스타일뿐만이 아니다. 소품 하나하나 레이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준비했다.

"사소하게는 아이스커피를 마실 때는 꼭 빨대가 있어야 한다거나, 태국에서 돈을 전달할 때도 시장에서 쓰는 비닐봉지를 구해달라는 등 눈에 띄지는 않지만 세세한 설정을 계속 요구했어요. 레이라면 돈다발을 시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비닐봉지에 담아 무심하게 건넸겠다 싶었죠. 이런 것들을 찾고 구현하는 게 배우의 재미인 거 같아요."

(사진=CJ엔터테인먼트 제공)
◇ 황정민 그리고 박정민과 재회하다

영화 외적으로는 느와르 영화 '신세계'(감독 박훈정, 2012)에서 호흡을 맞춘 바 있는 황정민과의 재회에 큰 관심이 쏠렸다.

"같은 배우와 두 번, 세 번 같이 작업한다는 게 사실 엄청 어려운 거예요. 인연이 그렇게 잘 안 닿죠. 그런데 정민 형과 다시 만난 걸 보면 뭔가 특별한 인연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어요. 저와는 전혀 다르게 연기하는 모습, 시나리오를 읽었을 때와는 다른 느낌으로 연기하는 것을 보면서 자극을 많이 받아요. 박정민씨도 마찬가지고요."

이정재가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에서 제일 궁금했던 캐릭터가 있다. 바로 '사바하'에서 호흡을 맞춘 적 있는 박정민이 맡은 '유이'다. 유이는 인남의 마지막 미션을 돕는 조력자다. 유이로 분한 박정민은 이번 영화를 통해 또 한 번 파격 변신을 펼쳤다. 이정재는 영화를 본 후 '역시 잘한다'고 생각했단다.

"'그것만이 내 세상'에서도 정말 뛰어난 연기를 했고, 그 전과 그 이후도 잘했죠. 비슷한 캐릭터가 없었어요. 이번 유이 역을 하면서도 본인이 고민을 되게 많이 했을 텐데, 너무나도 훌륭하게 아주 디테일한 애드리브부터 시작해서 행동이나 말에 대한 표현 등 여러 가지를 모두 다 멋지게 해냈죠. 이번 영화의 공로자가 아닌가 싶어요. 박정민씨 덕분에 우리 영화가 훨씬 더 풍요로워졌어요."

(사진=CJ엔터테인먼트 제공)
◇ '이정재가 잘했네' 소리를 듣고 싶다

개성 강한 캐릭터들이 만들어가는 영화인 만큼 장면 하나하나가 강렬하다. 그중에서 레이가 등장한 장면 가운데 인상적인 부분을 물었다.

"태국 뒷골목의 차고지에서 벌이는 '셔터 신'에 다양한 레이의 모습이 들어있는 게 아닌가 싶어요. 레이가 어떤 사람일지 셔터 신을 보면 좀 더 명확하게 느낄 수 있을 거예요. 그만큼 잘 표현이 된 것 같아요. 화면에는 잘 안 나왔던 거 같은데, 액션 중간에 책상을 타고 넘어가 상대방을 제압하려는 커트가 있어요. 거기에서 레이의 표정 같은 것들이 잘 살아났죠."

그렇다면 영화 전반을 통틀어 관객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길 장면은 어떤 장면이었을까.

"맨 마지막에서 인남의 얼굴이죠. 이 영화에서 마지막 인남의 감정이 가장 중요한 거였고, 그걸 정민이 형이 너무나도 잘 표현하고 있어요."

쫓기는 자 인남은 쫓는 자 레이로 인해 더욱 깊이 있는 감정을 끌어낼 수 있었다. 인남과는 정반대의 색채와 분위기로, 레이는 영화가 끝나는 순간까지 강렬한 이미지를 남긴다.

'하녀' '도둑들' '관상' '신세계' '암살' '신과 함께' 시리즈 '사바하' 등 다양한 장르 영화에서 매번 다른 캐릭터로 관객들을 사로잡은 이정재. 그는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속 레이를 통해 다시금 자기만의 새로운 캐릭터를 만들어냈다.

"제 캐릭터가 매번 아주 인상적일 수도 없고, 호평 받을 수도 없어요. 그래도 관객분들이 좋아하고 사랑해 주셨으면 하는 바람은 있어요. 캐릭터를 만드는 데 있어서 관객분들이 좋아하실까 생각하는 게 반, 나머지 반은 내가 생각한 것이 영화에 맞고 잘 해석했는지 하는 거예요. 이번에도 관객들께서 '이정재가 잘했네' 정도만이라도 생각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진짜 레이 같다' 내지는 '영화 안에 잘 묻어 있네'라고 말이죠."(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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