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북한의 남북공동연락사무소 폭파와 서해북방한계선(NLL) 일대에서의 군사훈련 재개 등으로 한반도에 긴장감이 고조되면서 과거 국지 도발을 경험했던 서해5도 주민들의 불안감도 증폭되는 분위기다.
◇ 주민들도 모르는 대피 매뉴얼…"대피소 집결이 유일한 피란 대책?"
18일 인천시와 옹진군, 서해5도 주민 등에 따르면 현재 북한의 포격과 미사일 도발 등 유사시에 서해5도 주민들은 대피소로 피란하는 것 외에 다른 대피 방법이 없다.
실제 최근까지 서해5도에서 이뤄진 을지프리덤가디언(UFG) 연습 등 대피 훈련도 대피소 집결 외에 다른 훈련은 없었다. 적기가 출현한 상황을 가정해 공습경보가 발령된 상황에서도 섬 탈출 계획은 빠졌다. 공습경보가 해제된 이후에도 섬 탈출 훈련은 이뤄지지 않았다.
정부는 대피소 집결 외에 별도의 피란 계획이 있지만 3급비밀인 '충무계획'에만 반영돼 있어 주민들에게 공개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당사자인 주민들도 모르게 피란계획을 수립하는 건 효용성이 없고 오히려 불안을 가중시킨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인천시 관계자는 "자체 매뉴얼상 유사시 주민들을 대피소로 이동시키라는 지침만 나와 있다"며 "이후 피란 계획은 3급 비밀인 충무계획에만 반영돼 있어 알려줄 수 없다"고 말했다
서해5도 주민들은 육지 군사분계선의 경우 비무장지대(DMZ)의 완충작용으로 군인들 간 교전이 일어나도 민간의 직접 피해는 없지만 해상인 서해5도의 충돌은 민간인이 직접 피해를 입기 때문에 피란 계획을 공유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 유사시 ①신속 경보 체계 ②섬 내 대피소 안전 확보 ③주민들의 육지 수송 ④육지 도착 후 숙소 지원 등을 체계화 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섬 탈출 계획까지 대피 매뉴얼에 담보돼야 한다는 것이다.
유사시 서해5도 주민 대피 매뉴얼과 관련한 논의는 연평도 포격사건 직후인 2010년부터 꾸준히 이어졌다. 같은 해 12월 3일 국회 행정안전소위원회 특별법 제정 심사 회의록을 보면 유사시 서해5도 주민 대피에 대한 당시 정부의 입장을 확인할 수 있다.
이 회의에 출석한 당시 행정안전부 안양호 2차관은 "영토 수호 개념에서 주민들이 다 빠져나오고 군인들만 섬에 남아 있게 되면 자칫 국제 분쟁지역이 될 수 있다는 전문가 의견이 있다"며 "NLL을 사수하려는 우리 국방‧안보정책상 주민들이 빠져나오게 하는 지원 대책을 하는 것은 안된다고 본다"고 말했다.
서해5도 주민들의 대피 매뉴얼은 이 시기 이후 수립됐으며, 현 정부에서도 이 기조는 유지되고 있다는 게 관련 지자체인 인천시와 옹진군의 설명이다.
주민들의 반발은 여전히 거세다. 박태원 전 연평도 어촌계장은 "머리 위에 포탄이 떨어지는 상황에서 정부가 국민에게 섬에 가만히 있으라고 강요할 수 있는가"라며 "포격사건 이후 10년이 지났지만 포격 당시보다 더 나은 상황이라고 말할 수 있는지 의문"이라고 토로했다.
서해5도 주민들이 정부의 유사시 대피 매뉴얼에 대해 불신하는 건 2010년 연평도 포격사건 당시 경험 때문이다. 당시 북한이 쏜 포탄이 떨어졌을 때 주민 394명은 직접 어선을 몰고 섬을 탈출했다. 포격사건 이후 5일 동안 주민 96%에 해당하는 1천300여명이 섬을 빠져나갔다.
그러나 임시 거주시설이 마련되지 않아 찜질방 등을 전전하며 3달가량 힘겨운 피란 생활을 해야 했다.
이 때문에 유사시 주민들이 정부의 '알 수 없는' 대피 매뉴얼대로 움직이겠냐는 지적이 나온다. 1차적으로 대피소로 집결하겠지만 결국엔 주민들이 각자 어선을 몰고 육지로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대피소가 자체 발전기와 취사 시설 등을 갖췄다고 하더라도 임시 시설일 뿐 궁극적인 피난처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어선 대피가 불가피하다는 의견도 있다. 연평도의 경우 수심이 얕아 50t 이상 선박의 접안이 불가하기 때문에 얕은 수심에서도 운항할 수 있는 어선 밖에 탈출 수단이 없다. 주민들은 연평 포격 사전 이후 줄곧 대형선박이 정박이 할 수 있도록 연평도에 신항을 건설해달라고 정부에 요구했지만 아직 첫 삽도 뜨지 못했다.
서해5도 평화운동본부 박원일 사무국장은 "주민이 숙지하지 못한 피난 매뉴얼은 막상 상황이 발생할 경우 제 역할을 하기 어려울 가능성이 높다"며 "요즘처럼 한반도에 전운이 감돌 때 서해5도 주민들이 스스로 살 길을 찾지 않을 수 있는 대피 매뉴얼이 수립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편 정부는 연평도 포격사건 이후 서해5도에 주민대피시설 44곳(연평 8‧대청 9‧백령 27)을 마련했다. 이들 대피시설은 9천여명을 수용할 수 있다. 지난달 말 기준 서해5도 인구 8742명(연평 2063명‧대청 1479명‧5200명)인 점을 감안하면 100% 이상의 수용능력을 갖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