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와 중·고등학교 모든 국어책에 시가 실려 있는 시인. '자세히 보아야 예쁘고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는 풀꽃시로 많은 이들을 울리고 희망을 줬던 시인 나태주(76)다.
시인들은 코로나19로 일상이 정지된 세상을 어떻게 보았을까. 또 그들에게 받을 위안은 없을까?
시인이 되는 것과 계속 자연과 가까운 곳에서 살겠다(충남 서천·공주)는 꿈을 이뤄내고 늘 하루를 세상의 첫날이자 마지막 날처럼 살려고 한다는 그를 18일 서울 운현궁 근처에 있는 한국시인협회 사무실에서 만났다.
그는 아내가 챙겨주는 가방을 들고 월요일에만 서울 사무실로 출근한다. 그의 말대로라면 그는 올해부터 늙다리 한국시인협회장(43대)이 됐다. 1대 회장이자 간사였던 유치환 선생 이후 서울 경인권이 아닌 지역에 사는 첫 회장이라고 의미를 부여하고 웃었다.
본격적인 인터뷰 전에 날이 날인 만큼 5.18 광주항쟁 얘기가 먼저 나왔다.
"전두환, 그 사람은 참 어쩌려고 그러는 건지 모르겠어요. 당시 학교에 있었는데 정확한 소식을 모르니 많이 불안하고 떨었지요. 대전에서 마산을 가려고 터미널에 갔는데 광주 가는 표를 파는 창구가 딱 닫혀 있더라고요. 우리 근현대사의 가장 큰 문제고 해결해야 될 것이 친일파와 6.25전쟁, 민주화 과정에서 벌어졌던 5.18 같은 일련의 사건이라고 봐요"
◇"2007년에 크게 아파서 105일 동안 물도 못 마셔…지금 하루하루가 선물"
나태주 시인은 초등학교 교장을 하던 2007년 큰 수술을 받았다. 간과 쓸개, 췌장 등 오장육부를 뭉텅이로 잘라 냈다.
"제 삶을 본다면 2007년 이전과 이후로 나뉘어요. 죽다가 살아난 건데 그때 105일 동안 물한잔 못 마시고 링거에 목숨을 의지했어요. 그리고 나서 일상에 대한 감사가 더 커졌지요. 물 한 잔에도 감사가 있어요. 저녁에 자기 전에 하나님께 부탁해요. 오늘도 잘 살았으니 내일도 잘 살게 해달라고요. 아내와 날마다 아침을 맞으면 이것이 첫날이다 선물이라며 감사해하지요. 2007년 이후 책도 더 많이 팔리고 상도 더 많이 받은 것도 축복이고요.(웃음)"
그는 거의 매일 시를 쓴다고 한다. 일부에서는 시를 너무 많이 써서 묽다는 얘기도 하지만 쓰고 싶은 게 너무 많단다.
'어제는 뭘 쓰셨어요'라고 묻자 바로 핸드폰을 열어서 아직 노트에도 옮기지 않은 초고라며 동시를 낭랑하게 읽어줬다.
시 제목은 새집 관찰. '우리 집 처마 밑에 새끼친 딱새. 공부하다 보면 딱새 엄마 둥지로 들어갈 때도 뭔가 주둥이에 물고 가고. 나올 때도 주둥이에 뭔가 물고 나온다. 들어갈 때는 먹이를 물고 가고 나올 때는 새끼새 똥을 물고 나오는 거란다. 엄마가 일러주시는 말씀. 아 그렇구나. 엄마새도 새끼새 기저귀를 그렇게 갈아주는 거구나'
공주 풀꽃문학관에 자신만 아는 비밀이 하나 있는데 단체 관람객이 드나드는 출입구 지붕 사이에 새집이 있는 것이라고. 해마다 새가 새끼를 키워 나가는데 새끼의 똥을 물고 나오는 것을 보고 쓴 동시란다. 새가 불안하지 않도록 코로나19 핑계 삼아 그 출입구를 닫았다고 한다.
"어미새가 새끼 똥을 물고 나가는 건데 정말 놀라운 거에요. 애기 기저귀를 갈아주는 거죠. 어른들도 동시를 읽어야 됩니다. 어른들에게 어린 아이 시절을 기억하게 해줘야 돼요."
자연과 일상에 대한 그의 관찰은 결국 '자세히 보아야 예쁘고 오래 봐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는 시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왜 자세히 오래 봐야 하냐면 사실 모든 것이 예쁘지 않고 사랑스럽지 않기 때문이에요. 사람을 자세히 오래 봤기 때문에 예쁘고 사랑스러운 거에요. 진짜 예쁜 것은 언뜻 봐서 예쁜 게 아니에요. 아내도 오래 살아서 좋은 아내가 진짜 좋은 아내에요. 한 오륙십년 살아보고 이혼하라고 권하고 싶어요. 하긴 그 때가 되면 자동적으로 이혼이 되죠. 하나가 먼저 죽으니까.(웃음)"
◇"코로나19에 나타난 '너도 그렇다'가 지혜로운 극복의 계기돼"
그는 풀꽃시가 많은 사랑을 받는 것에 대해 자기네들 얘기를 써줬기 때문에 또 자기네들 삶을 바꾸고 싶어하는 마음 때문이라고 했다.
"이제는 나만 그렇다가 아니고 너도 그렇다는 의미를 합의하지 않아도 다 알아요. 초등학생들도요. 사람들은 그럴 듯하고 멋있고 대단한 시를 원하는 게 아니에요. 내 피부에 가깝고 내 삶에 가까운 나의 얘기를 써달라는 거였어요."
시인은 코로나19에서도 '너도 그렇다'를 봤다고 한다. 국민들이 나를 위해서지만 또 너를 위해 마스크를 썼다는 것이다.
"나를 위해서도 쓰지만 너를 위해서도 쓰는 거 아니에요? 매우 감사하지요. 내가 받은 마스크 몇 개를 비닐봉지에 넣어서 경찰서에 걸어 놓는 할머니와 아이. 얼마나, 얼마나 감사해요. 눈물나도록 감사하지요. 우리 국민의 심성이에요."
그는 행복에 대해 돌아갈 집과 함께할 사람, 외로울 때 혼자 부를 노래가 있다는 것이라고 쓴 바 있다. 작은 것에 만족하라는 것이다.
"노래는 꼭 노래만이 아니고 내가 좋아할 만한 문화적 가치를 얘기한 거에요."
그래도 미련스럽게 실제 즐겨 부르는 노래를 물었다.
"문학관에서 사람들하고 풀꽃노래를 불러요. 산버찌 나무 아래서도 부르고..."
대중가요도 부르는데 아내와 '봄날은 간다'를 함께 부르기를 좋아한다며 "연분홍 꽃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한 소절을 불렀다.
"5월에는 어머님 은혜를 부르는데 나이 든 사람은 다 웁니다. 오르간 반주하면서 불러줘요. 원로분들이 오시면 메기의 추억도 부르고요."
어느 집이나 비슷하지만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불편할 때가 많다. 기자도 마찬가지다. 엄한 아버지 밑에서 자란 자식은 그의 자식에게도 엄한 경우가 많다. 다정다감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책에 쓰신대로 저도 그렇다고 하니 "아버지를 용서하고 자식에게 용서를 받으세요"라고 했다. 자신도 남은 인생의 과업이라면서...
"고등학교 입학 시험 때 추운 겨울이었는데 아버지가 보호자로서 삼촌의 여름 양복을 빌려 입고 오셨어요. 남들은 제일모직 양복에 외투까지 입었는데 부끄러웠어요. 그래서 아버지의 인생은 춥지 않게 사는 것이었고 제 인생은 부끄럽지 않게 사는 것이 됐지요. 지금은 비난하고 싶지도 않고 춥지 않게 살려고 했던 것도 훌륭하다고 생각해요. 아버지를 불쌍하게 생각해요."
부끄럽게 않게 살려고 한다는 그의 생각은 정치로도 이어졌다.
"예전 위정자들은 국민들이 춥지 않게 살아야 한다는 것만 생각했어요. 국민들은 부끄럽지 않게 살고도 싶은데 정치 수준이 낮았던 거에요. 5.18도 결국은 부끄럽지 않게 살겠다는 것이었고요. 지금 정부도 잘해야 돼요"
◇"코로나19 전의 욕망을 다 채우긴 어려울 것…가난한 마음을 가져야 행복해져"
그는 코로나19로 세상 사람들이 힘든데 위안이 될 수 있는 말을 해달라고 하자 대뜸 "줄였으면 좋겠습니다"라고 했다.
"욕망을 줄이자는 거에요. 어차피 욕망이 코로나 이전 상태로는 충족이 안 될 거 같아요. 먹는 것도 쓰는 것도 입는 것도 조금씩 줄이고 아껴 쓰면 좋겠어요. 예전이나 지금이나 저는 가난한 마음을 갖자고 해요. 이게 빈한한 마음이나 궁핍한 마음이 아니라 오래된 것, 작은 것, 가까운 것을 아끼는 마음이에요. 코로나로 우리 일상이 벼락맞은 것처럼 정지됐어요. 우리가 진정으로 바라는 거는 일상으로 돌아가는 거였고요. 그냥 만나고 밥 먹고 일하고 하는 거요. 그것을 빼앗겼다가 되찾은 것을 오랫동안 감사하고 욕망을 조금씩 줄임으로써 환란을 슬기롭게 극복하지 않을까 생각해요"
시인은 감사의 달인이다.
"제가 감사라는 시를 쓰기도 했어요. 지금이라도 시작할 수 있으니 얼마나 감사한가. 이 만큼이라도 남겨진 것이 얼나마 감사한가라고 쓴 시에요. 지금이라도 시작할 수 있다는 것에 주목하고 감사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장육부가 많이 고장나고 잘려져 나가고 정지가 된 상태에서 썼던 시에요. 남겨진 것에 감사하고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거에 감사하면서 다시 출발한다면 절망과 아픔이 줄어들 거에요. 그리고 한가지 더, 상대방의 아픔을 알아주는 거에요. 텔레비젼 연속극 대사. 아프냐? 나도 아프다처럼요"
"자기를 사랑하면 절대 포기하지 않아요. 이웃도 사랑하게 돼요. 청년들의 마음이 이럴 거에요. 밖은 너무 화려한데 내가 가진 것은 없다. 금수저 은수저는 안 좋은 말이에요. 그럴 필요 없어요. 더 자신을 사랑하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개인적으로 그의 시 '바람에게 묻는다'를 너무 좋아하기에 진짜 마지막이라며 스토리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는 결혼 전 좋아했던 여인이 있었다며 여러 얘기를 들려주고 나서는 이루어진 사랑과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 중에 어떤 게 나은 것이냐고 기자에게 웃으며 물었다.
그 절절한 이야기는 나중에 또 자세히 쓸 기회가 있을 것이다.
시인은 무슨 잘못을 해도 다 용서해 주고 자기가 좋아하고 예뻐하는 것들을 같이 사랑해줘서 이른바 상대가 패키지 사랑을 받도록 하는 아내에 대해 자신의 종교와도 같다고 치켜세웠다.
넘치는 사랑으로 남편을 무력화시키는 아내를 둔 그는 행복해 보였다. 오죽하면 책에는 "아내가 없으면 나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고도 썼다.
간결하고 맑은 시어, 여운이 긴 울림. 자연과 삶, 사랑에 대한 그의 노래가 오랫동안 이어지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