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27일 시민군은 전남도청에서 계엄군에 맞서 대화와 협상을 시도했다. 그러나 계엄군은 오전 4시쯤 3공수여단 특공조 79명을 도청 후문으로 투입했고 전방을 보고 있던 시민군은 무방비 상태로 총격에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결국 계엄군은 1시간여 만에 도청을 점거했다.
전두환은 1996년 8월 26일 1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지만 12월 16일 2심에서 무기징역으로 형량이 낮아졌다. 그러나 1997년 12월 22일 특별사면을 받으면서 그가 정작 교도소에서 수감된 일수는 2년 20일에 불과하다.
광주 민주화운동은 1980년 5월 18일 비상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하면서 시작됐고 열흘 뒤인 5월 27일 계엄군이 시민군을 제압하고 전남도청을 점령하면서 강제로 종결했다.
신군부 세력에 의해 무참히 짓밟혔던 광주. 헌정질서를 파괴한 이 행위를 심판하고자 민주화운동이 일어난 지 15년 만인 1995년 12월 21일 5.18 민주화운동 특별법이 제정됐다.
민주화운동이 시작된 5월 18일은 17년이 지난 1997년 4월 29일에서야 국가기념일로 제정됐다.
민주화운동의 첫 희생자는 청각장애인 김경철씨다. 그는 1980년 5월 18일 오후 공수부대원들에 둘러싸여 묻는 말에 대답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집단 구타를 당했다. 머리를 다친 김씨는 적십자병원을 거쳐 국군통합병원으로 옮겨졌지만 다음날 새벽 3시 숨을 거뒀다. 당시 그의 나이 24세에 불과했다.
전두환은 반란·내란수괴·내란목적살인·상관살해미수·뇌물죄로 기소돼 1997년 4월 대법원에서 무기징역 및 추징금 2205억원을 확정 선고받았지만 그는 전 재산이 29만원 밖에 없다며 추징금을 내지 않고 버텼다.
전남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한 윤상원 열사는 1978년 박기순 열사와 함께 들불야학을 만들며 노동자 야학 운동을 주도했다. 5.18 진실을 알리고자 투사회보를 배포하고 시민군 대변인으로 나섰던 윤 열사는 5월 27일 전남도청에서 계엄군에 맞서 싸우다 총상으로 사망했다. 당시 그의 나이 30세였다.
1980년 5월 29일 광주 북구 망월동 묘역에서는 5.18 관련 사망자 장례식이 진행됐다. 당시 피해자는 129명이었다.
1980년 5월 20일. 광주 버스 11대와 택시 200여 대는 계엄군 실탄에 맞서 시민들과 함께 계엄군이 주둔했던 전남도청을 향해 차량시위를 벌였다. 이 내용은 2017년 송강호 주연의 영화 '택시운전사'로 재조명됐다.
계엄군은 시민군이 전일빌딩에 모여있다는 정보를 듣고 1980년 5월 27일 새벽 헬기를 이용해 전일빌딩에 무차별 사격을 가했다. 고(故) 조비오 신부가 헬기 사격을 목격했지만 당시 헬기 조종사들은 이를 부인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 조사 결과 전일빌딩에는 245개의 총탄 흔적이 발견됐다.
전두환은 지난해 4월 출간한 회고록을 통해 광주 민주화운동에 600명의 북한군이 개입됐다고 주장했지만 국방부는 2013년 5월 30일 북한국 개입설이 허위임을 확인했다.
5.18 민주화운동 당시 군이 작성한 '광주사태 시 계엄군 실탄사용 현황'에 따르면 광주에 투입된 계엄군은 총 51만 2626발의 실탄을 사용한 것으로 드러났다. 계엄군은 M16 소총 외에도 기관총과 수류탄, 헬기 기관총 등 최소 11개 이상의 무기를 사용한 것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