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신(丙申) 국치', '제2의 을사늑약'으로까지 비판받는 굴욕 협상의 쓰린 기억이 되살아나기 때문이다.
아이러니 한 것은, 이런 부끄러운 흑역사를 불러낸 사람이 전직 외교부 고위 당국자들이라는 점이다.
외교부 1차관과 청와대 국가안보실 1차장을 지낸 조태용 국회의원 당선자(미래한국당)는 "'위안부 합의에 대해 윤미향 당선인에게 사전 설명을 했다'는 외교부 입장을 분명히 들은 바 있다"고 밝혔다.
그 외 익명의 전직 외교부 고위 당국자들도 언론을 통해 외교부가 윤 당선자에게 합의 내용을 사전에 알려줬고 윤 당선자는 수긍하는 반응이었지만 나중에 태도를 바꿨다는 식의 주장을 폈다.
외교부는 이들 주장과 선을 긋고 있지만, 그렇다고 과거 한솥밥을 먹던 처지에 대놓고 비판하기도 쉽지 않은 것 같다.
외교부 당국자는 14일 기자들에게 윤 당선자를 둘러싼 논란과 관련, 위안부 합의 검토 태스크포스(TF)가 이미 2017년에 결론 내린 사항이라고 밝혔다.
그는 지난 12일에도 기자들의 질문에 "TF 보고서를 반박하는 전직 당국자가 있던가요"라고 되물으며 TF의 결론에 무게를 실었다.
TF 보고서는 "외교부는 협상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피해자 쪽에 때때로 관련 내용을 설명하였다. 그러나 최종적·불가역적 해결 확인, 국제사회 비난·비판 자제 등 한국 쪽이 취해야 할 조치가 있다는 것에 관해서는 구체적으로 알려주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결과적으로 이는 조 당선자 등의 주장을 부정하고 윤 당선자의 손을 들어준 것으로 해석된다. 외교부가 간접적으로나마 최소한의 입장은 밝힌 셈이다.
하지만 한·일 역사갈등에서 위안부 합의가 차지하는 비중을 감안할 때 정부의 이런 소극적인 태도가 과연 온당한지 의문이다.
윤 당선자를 둘러싼 진실게임은 윤 당선자와 정의기억연대 등 관련 단체의 도덕성과 신뢰성 차원을 넘어 한일 과거사 문제 전반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만일 일각의 주장이 사실로 드러나 윤 당선자 등이 타격을 받을 경우 한일관계에서도 우리의 도덕적 우위가 크게 훼손될 수 있다.
설령 윤 당선자 등이 결국 '무고'한 것으로 밝혀지더라도 필요 이상 긴 논란에 휘말려 적전 분열상을 보이는 것 자체가 외교 역량을 스스로 갉아먹는 행태다.
타국과의 외교 협상에서야 TF 보고서 같은 제3의 입장을 인용함으로써 간접적으로 태도를 밝히는 게 세련된 방식일 수는 있겠다.
하지만 이번 사안은 국내 당사자 간의 진위 공방이다. 외교부는 구체적 진실을 알고 있는 거의 유일한 당사자로서 입장을 명확히 밝힐 수 있고 또 그래야 한다.
"협의 과정에서 피해자들의 의견을 충분히 수렴하지 않은 채 정부 입장을 위주로 합의를 매듭지었다"는 TF의 결론으로만 갈음하기에는 부족한 것이다.
더구나 외교부에는 임성남 주아세안 대사를 비롯해 위안부 합의 당시의 주역들이 여전히 현직에 남아있다.
당시 외교부 1차관이었던 임 대사는 합의 당일 언론사 정치부장들과의 오찬에서 엠바고 조건으로 사전 브리핑을 했다.
브리핑 내용에는 소녀상 이전과 불가역적 해결 같은 '독소조항'은 빠졌다. 윤 당선자의 주장과 일치하는 부분이다.
바로 이 점만 보더라도 전직 고위 당국자들의 주장이 맞는지, 현 고위 당국자의 설명이 옳은지 간단히 확인될 문제다.
위안부 졸속·굴욕 합의라는 원죄를 진 외교부는 진실에 대한 국민의 갈증을 풀어줄 책임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