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대 금액이 든 가방이 여러 사람 손을 거친다. 돈 가방 앞에서 서로 떠 보고 배신하고 해하는 내용은 범죄 액션에서 숱하게 본 이야기다. 영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감독 김용훈)의 큰 얼개도 이와 다르지 않다. 하지만 진부하지 않다. 주인공 아홉 명에 존재감을 발휘하는 조연까지 꽤 많은 인물의 사정이 수긍할 만하게 전개되는 까닭이다.
정우성도 바로 이 점이 마음에 들어서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 출연을 확정했다. "구구절절하진 않은데 굉장히 밀도있고 공감가기 쉽게" 돼 있다는 점 때문에. 지난 6일 오후, 서울 종로구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열린 라운드 인터뷰에서 정우성은 재미있게 읽은 시나리오에 더해 전도연 캐스팅이 작품 출연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 한 명도 소모되지 않는, 밀도있는 시나리오에 매료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은 동명의 일본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정우성은 원작 소설을 따로 읽진 않았다. 범죄물 장르를, 혹은 자신이 맡은 태영이란 캐릭터를 위해 특별히 어떤 자료를 참고하지도 않았다.
"시나리오 구성이 좋았다"라고 말문을 연 정우성은 "인물 사연이 구구절절하진 않은데 굉장히 밀도있고 공감가기 쉽게 설명돼 있다. 전 아직 원작은 안 읽었는데, 아마 원작이 가진 장점을 충분하게 시나리오로 끌고 오려는 게 감독의 선택이었던 것 같다. 그러니까 소모되는 인물이 없지 않나. 돈 가방이라는 선정적인 소재를 가지고 인간의 욕망에 포커스를 맞출 수 있었을 텐데, 이들이 돈 가방을 차지하기 위한 갈등과 고민이 더 돋보인 것 같다"라고 말했다.
언론 시사회 때 영화를 처음 봤다는 정우성은 본인이 맡은 태영 캐릭터가 붕 떠 있지 않을까 걱정됐다면서도, "영화가 잘 완성돼 부끄럽지 않다"라고 답했다. 예비 관객들에게 관전 포인트를 짚어 달라고 하니 "없다"라며 웃었다. 그러면서 "그게(관전 포인트) 다 다를 수밖에 없지 않나. 사람은 다 다르니. 각자 다 다른 여운을 가질 수 있는 영화가 되지 않을까"라고 예측했다.
◇ 과하지 않은 호들갑으로 '태영'을 만들다
정우성이 연기한 태영은 사라진 애인 연희(전도연 분) 때문에 빚에 시달리며 한탕을 꿈꾸는 세관 공무원이다. 태영은 자신을 배신하고 떠난 게 명백한 애인을 여전히 그리워하며 '뭔가 사정이 있었겠지'라고 생각하는 인물이다. 말 그대로 '호구'다.
첫 촬영은 연희의 돈 가방을 부둥켜 안고 택시 안에서 연희와 통화하는 장면이었다. 정우성은 당시 자신이 선보인 태영 연기를 보고 김용훈 감독이 당황했던 것 같다고 전했다. 태영이 왜 이렇게 표현돼야 하는지를 설명했고, 김 감독 역시 정우성의 의견을 바로 받아들였다. 정우성은 "그다음 촬영 때부터 그런(제가 만든) 태영에게 애정을 가져주더라. 그래서 더 확신을 갖고 할 수 있었다"라고 밝혔다.
정우성은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에서 가장 인간적인 캐릭터는 중만(배성우 분)인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중만은 사실 악한 사람은 아니지 않나. 고민하고 갈등하고 현실의 절박함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하기에, 중만이 인간의 고뇌와 갈등의 중심인물이라고 생각한다"라면서 "태영도 악한 인물은 아닌 것 같다"라고 바라봤다.
단, 오버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정우성은 "제일 경계해야 할 게 과함이지 않나. 과하지 않은 라인까지 딱 치고 올라가서 그 안에서 호들갑을 떨었단 생각이 든다"라며 "태영을 떠나서 영화가 잘 완성됐고 부끄럽지 않더라. 이 영화는 시간이 지나도 사람들이 볼 수 있는 영화가 됐다는 생각에 흐뭇하고 흡족했다"라고 전했다.
◇ 현장에서 어떨지 궁금했던 '동료' 전도연과 만나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은 각각 20년 이상의 경력을 지닌 정우성과 전도연이 처음 같이 나온 작품으로도 눈길을 끌었다. 정우성은 이날 인터뷰에서도 "전도연이라는 배우가 캐스팅돼 있었던 게 컸다. 막연히 (같이 연기)하고 싶단 생각은 있었지만, 그것만을 위해 간절히 작품을 찾을 순 없다. 이 시나리오를 보고 이번이 기회겠구나 했다. (작품) 선택에 큰 원동력이 된 것 같다"라고 답했다.
극중 태영과 연희는 오랜 연인이다. 그러다가 연희는 홀연히 태영을 떠나버렸고, 태영은 연희의 빚을 꼼짝없이 뒤집어 쓰게 된다. 원수처럼 느껴졌을 법도 한데, 마치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돌아와 자신에게 밥을 차려주는 연희에게 태영은 끝내 가라고 하지 못한다. 태영의 허술함이 가장 잘 드러날 때가 바로 연희와 함께일 때다.
첫 번째로 연기 호흡을 맞춘 소감은 어떨까. 정우성은 "외형적으로 아무리 어울려도 둘이 붙여놨을 때 감정적인 교감이 튕겨나간다면, 두 사람의 모습이 굉장히 불편하게 보일 것 같다"라며 "태영과 연희로 앉아있는 두 사람의 식탁 자리가 저는 나쁘지 않았던 것 같다"라며 만족감을 표했다. 그러면서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에서 전도연을 만나서 무척 반가웠다고 밝혔다.
"사실은 우리가 맨날 동료다, 같은 업계에 있다고 하지만 서로를 잘 보거나 서로를 표현할 기회가 없거든요. 영화에 대해서 이야기할 기회도 별로 없고요. 그렇기 때문에 첫 번째로는 '아, 내가 영화 현장에 있을 때 어떤 모습인지 보여줘야 되겠다'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거를 도연 씨가 봐주길 원했어요. 그리고 나도 도연 씨가 현장에선 어떤 모습인지 막연한 궁금증이 있었고요. 그렇게 긴 시간 전도연이란 이름으로 자리할 수 있었던 건 영화에 대한 애정과 현장에 대한 책임감이 있지 않을까 하고요. 어떤 때는 캐릭터를 구현하기 위해서 강단 있게 고집도 부리지만, 결국엔 이 현장에서 영화를 위한 책임감이 동반된 모습이 있더라고요. 동료의 그런 좋은 자세를 확인할 수 있는 값진 경험이었어요.
저 또한 현장의 저를 (도연 씨가) 잘 봐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저라는 배우가 어떻게 현장에서 임하는지, 어떻게 노는지, 배우로서 동료로서 인정해주는 거 같아서 좋았고요. 이렇게 경력이 오래되고 각자 자기 색이 있는 배우끼리 부딪힐 때는 캐릭터와 캐릭터끼리 만남에서의 교감을 이끌어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현장에서 내가 어떤 배우라는 걸 입증하는 것도 현장 분위기를 이끌어가는 중요한 요소라고 봐요. 두 가지가 다 교감이 돼서 즐거운 작업이었던 것 같아요."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