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망과 함께 일본 기업인들이 모두 일본으로 철수하면서 남한내 생산은 멈춰섰다. 조선총독부가 패망 직전까지 마구잡이로 돈을 찍어내는 바람에 물가는 천정부지로 오르고 있었으니, 광복 이후 남한은 심각한 인플레이션에 시달리고 있었다.
동아일보 1945년 12월 7일자 가십 기사를 보면
“세계가 통틀어 전화(戰禍)중(中)에 휩쓸린 관계로 전쟁에 따르는 고물가 현상은 역시 세계적 파문이어니와 전화의 파괴를 면한 우리 땅에 악성 고물가가 점점 더해감은 무슨 까닭인가?
이른바 공출에 의한 일용물자의 고갈도 일인(一因)이오, 수요에 따르는 생산의 불급도 일인이려니와 가장 악질의 원인은 8.15 이후 45억의 휴지지폐를 찍어내인 왜정의 최후모략. 이 모략으로 생겨난 물가고 때문에 민중의 생활은 지금 파멸에 직면하고 잇거니와…“
당시 민중들의 가장 큰 고통은 바로 제1 생필품인 쌀값의 폭등이었다. 역설적이게도 해방 그해 남한은 대풍년이었다.
하지만 미 군정이 진주 한 달 만에 ‘미곡 자유화’를 첫 정책으로 덜컥 시행하면서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그때까지도 이어져온 식량 배급제를 하루 아침에 자유거래로 바꿔 시장에 맡긴다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심각한 인플레이션을 겪고 있는 상황에서 거래자유화를 시켜놓으니 지주와 중간상인들의 사재기로 쌀값은 천정부지로 뛰기 시작했다.
1946년 1월 쌀 한 말 소매가격은 130원. 미 군정이 정해놓은 최고가격 38원보다 훨씬 높았다. 2월에는 더 올라 320원이 됐고 3월에는 6백원까지 치솟았다.
다시 동아일보 기사를 보면
“가장 중요한 미가(米價, 쌀값)의 점등(漸騰, 점점 오름)은 일시도 방치를 불허할 목전의 최대문제. 하늘이 모처럼 풍작을 주었거늘 이를 기화로 삼아 대량매점을 하는 모리배(謨利輩), 일본으로 밀수출하는 모리배가 준동한다는 소식에는 기색(氣塞, 숨이 막힘)하다 못하야 기절(氣絶, 숨이 끊어짐)할 지경. 법적 이론은 차치하고 이러한 매국적 망국적 도배는 극형으로 즉단해도 만무이론. 민중은 감시하라, 고발하라, 그리고 혼장(混杖, ‘곤장’의 오기인 듯)을 안기라.”
모리배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무리들을 가리킨다. 당시 신문을 보면 ‘모리배’와 ‘간상(奸商, 간사한 방법으로 부당이익을 취하는 상인)’에 대한 기사가 끊이지 않는다.
기자는 며칠전 이같은 실태를 고발하는 기사를 썼다. ‘"마스크 대란, 일생일대 기회" 어느 마스크업자의 탐욕’이라는 제목의 기사였다. ‘코로나-19사태가 일생일대의 기회요, 한번 거래로 30억 원을 벌 수 있기 때문에’ 가격을 3배로 올려 받겠다는 마스크 유통업자의 얘기였다.
기사 내용보다 놀라운 것은 댓글들이었다.
‘외부상황에 따라 가격 특수를 보는 것은 당연한 이치’
‘특수한 상황에서 가격폭리는 당연’
‘메르스 때는 크게 재미를 못봤는데 이번에는 사업적으로 잘 됐으면 한다’
‘벌 때는 벌어야지’
‘30억 원이면 그럴만 하다’
‘일생일대의 기회가 맞다. 욕할 수 없을 듯’
‘탐욕이라기 보다는 물 들어올 때 노 젓는다고’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잠깐 욕 먹고 왕창 벌면 결국 이기는 것이다. 돈 많으면 욕 하는 사람 지배하고 신경 안쓰고 즐기게 된다’
‘다 때가 있는 법이다. 기회를 놓치면 안된다. 비싸게 이득 남겼다고 욕하지 마라’
2020년 한국의 마스크 ‘대란’은 일부 모리배들의 ‘대박’이 아닌 우리 모두의 ‘꿈’이 된 것인가? 바이러스보다 더 무서운 현실이다. 이런 현실이 앞으로 어떤 미래를 가져올지 더욱 더 두렵다.
해방 정국의 쌀값 대란은 결국 1946년 ‘대구 10월 사건’(기존에 ‘대구 폭동’으로 불렸던 사건)으로 터졌고, 이후 극심한 좌우 대립과 한국전쟁의 불씨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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