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명선언', '흔들리는 마음' 무단도용 논란…진실 밝혀질까

무단 도용 문제제기 22년 만에 비교 상영회 열려
'9분 40초' 영상 둘러싸고 양측 주장 첨예하게 대립
홍형숙 감독 "원본·복사본 보낸 것은 '사용 전제로 한 행위'" 주장
양영희 감독 "영상 사용에 한 번도 협의한 적 없어" 반박
양 감독, 홍 감독 사과 원하지 않는다고 밝혀…제작 환경 개선 바라

22년 만에 열린 재일교포 출신 양영희 감독이 만든 일본 NHK 다큐멘터리 ‘흔들리는 마음’(1996)과 홍형숙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본명선언’(1998) 비교 상영회가 지난 7일 오후 서울 은평구 녹번동 서울기록원에서 진행됐다. 양영희 감독이 자신의 입장을 밝히고 있다. (사진=최영주 기자)
"작품을 만드는 데 참고 자료로 사용하라고 (촬영 테이프를) 보냈는데, 이걸 마음대로 갖다 붙이는 사람이 세상 어디에 있나요? 세계 영화사에 남을 범죄라고 생각합니다. 한쪽에서는 영화 '기생충'이 세계를 휩쓴다는 이야기를 하는데, 한쪽에서는 이런 (무단 도용) 이야기를 하니 참담합니다." _양영희 감독

홍형숙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본명선언'(1998)이 재일교포 출신 양영희 감독이 만든 일본 NHK 다큐멘터리 '흔들리는 마음'(1996)을 무단 도용했다는 논란이 22년 만에 다시 수면 위로 떠 올랐다.

지난 7일 오후 서울 은평구 녹번동 서울기록원에서는 처음 문제가 제기된 지 무려 22년 만에 "양영희 감독의 '흔들리는 마음'&홍형숙 감독의 '본명선언' 비교상영회"가 열렸다. 이날 홍 감독은 참석하지 않았다.

(사진=독립영화협의회 제공)
◇ 22년 만에 공론화된 무단 도용…'9분 40초' 영상 둘러싸고 양측 첨예하게 대립

'디어 평양'(2006)·'굿바이, 평양'(2011)·'가족의 나라'(2013)를 연출한 양영희 감독은 자신이 연출한 '흔들리는 마음' 방영 본 중 7분 50초, 원본영상 1분 50초를 홍형숙 감독이 '본명선언'에 무단으로 도용했다고 문제를 제기하며 표절 시비로 불거졌다. 이게 1998년의 일이다.

양 감독은 1998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최우수 한국다큐멘터리 상인 운파상을 수상한 '본명선언'이 저작권을 침해했다며 한국에서 비교 상영회를 열 것을 부산국제영화제 측에 요구했다. 그러나 재일교포인 양 감독의 국적 문제로 국내 입국이 어려워 비교 상영회가 열리지 못한 채 논란은 사람들에게서 잊혔다.

논란 이후 홍 감독은 ‘두밀리, 새로운 학교가 열린다’(1995), ‘경계도시 2’(2009), ‘준하의 행성’(2018) 등을 연출하며 다큐멘터리 영화 부문에서 입지를 다졌다. 2019년에는 미국 영화예술과학아카데미 다큐멘터리 부분 회원으로 위촉됐다.

그러나 홍형숙 감독이 '경계도시 2' 제작 당시 스태프들에게 인건비를 지급하지 않고, 이를 유용했다는 지난달 '씨네 21'의 연속 보도를 본 양 감독이 자신의 사건을 고백하겠다고 '씨네 21'에 메일을 보냈다. 이를 계기로 '본명선언' 무단 도용 논란이 공론화됐고, 비교 상영회로 이어졌다.

이처럼 22년 만에 수면 위로 올라온 문제의 핵심은 표절이 아닌 '무단 도용'이다.


'본명선언'에는 양영희 감독의 모습은 물론 이름 때문에 울어 본 적이 있느냐는 양 감독의 말에 홍형숙 감독이 재일교포의 삶을 담기 위해 일본 오사카에 왔다는 내용의 내레이션이 나온다. 영화 마지막에는 스태프 등의 자막이 올라가는 가운데 '8mm 취재 양영희'라고 나온다. 그러나 '본명선언'에 삽입된 영상이 NHK 프로그램 '흔들리는 마음'이라는 점 혹은 이를 방송하고 저작권을 가진 주체가 NHK라는 표기는 없었다.

무단 도용 논란이 공론화된 후인 지난 4일 홍영숙 감독은 SNS(사회관계망서비스)에 '본명선언' 구성안을 보이며 해당 내용을 설명하고, '흔들리는 마음' 영상자료 사용 등에 대한 협의를 진행했다고 밝혔다. 또한 양 감독이 촬영 원본 및 복사 테이프를 보낸 것에 대해 홍 감독은 "원본과 복사본을 함께 보냈다는 것은 '사용을 전제로 한 행위'"라고 설명했다.

무단 도용 논란이 일어난 장면 중 하나. 사진 왼쪽은 양영희 감독의 ‘흔들리는 마음’(1996), 오른쪽은 홍형숙 감독의 ‘본명선언’(1998).
지난 7일 오후 서울 은평구 녹번동 서울기록원에서 '양영희 감독 흔들리는 마음&홍형숙 감독 본명선언 비교상영회'가 열린 가운데, 한국영화감독조합을 대표해서 온 박찬욱 감독이 발언하고 있다. (사진=최영주 기자)
◇ "내 영상을 1초라도 쓴다면 합의가 이뤄지는 게 상식"

비교 상영회에 참석한 양영희 감독은 재일교포에 관한 작품을 만들려고 한다는 홍 감독의 말에 자신이 취재한 장소를 알려주고 사람들도 소개해 줬다고 말했다. 또한 자신이 찍은 원본 촬영 테이프 등을 보내 달라는 홍 감독의 요구에 재일교포 문제를 널리 알리고, 홍 감독의 이해를 돕기 위해 테이프를 제공했다고 설명했다.

양 감독은 구성안 문제에 관해 "구성안을 봤다고 해서 내 영상을 (홍 감독) 좋을 대로 쓰라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한 번이라도 철저하게 협의해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촬영 테이프 제공과 관련해 양 감독은 "영상 작업을 하는 사람으로서 테이프를 주는 건 쉽지 않았다"며 "테이프를 주면서도 강조한 건 홍 감독이 내 영상을 1초라도 쓴다면 꼭 가편집 영상을 보고 합의가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하는 게 상식"이라고 말했다.

양 감독은 홍 감독의 사과를 원치 않지만, 이와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올바른 제작환경의 조성을 위해서라도 논란이 해결되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이처럼 22년 만에 다시 불거진 무단 도용 논란에 영화계 관계자들도 관심을 두고 비교 상영회에 참석했다.

박찬욱 감독은 "오늘은 한국영화감독조합을 대표해서 왔다"며 "이번 사안에 대해 조합도 큰 관심을 두고 지켜보고 있고, 오늘 보고 들은 이야기를 조합에 전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전양준 부산영화제 집행위원장은 "'본명선언' 사태에 책임이 있는 기관의 장으로서 무거운 책임을 느끼고 있다"며 "진실이 밝혀지고, 빨리 모든 것이 명확해지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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