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의 부장들' 주인공 김규평처럼 당대 중앙정보부장을 지낸 김재규는 1979년 10월 26일 대통령 박정희를 암살했다. 이른바 10·26사건이다. 이틀 뒤인 그해 10월 28일 체포된 그는 내란목적살인·내란미수죄로 사형선고를 받고 이듬해인 1980년 5월 24일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영화 마지막에 등장하는 법정 최후 진술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김재규는 스스로 벌인 박정희 암살을 '혁명'으로 규정했다.
역사학자인 한홍구 성공회대 교양학부 교수는 "실제 김재규 본인은 그런 생각을 했다"며 "그런(혁명으로 볼 수 있는) 측면이 분명히 있었던 것으로 생각한다"고 전했다.
한 교수는 "혁명에도 여러 유형이 있는데, 10·26은 분명 민중혁명은 아니"라며 "굳이 유형을 나누자면 '궁정혁명'을 시도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부연했다.
영화 '남산의 부장들'에서는 박정희를 향한 김재규의 충성에 커다란 금을 낸 결정적인 계기로 '박정희 유신체제 철폐'를 외쳤던 부마항쟁을 지목한다. 현실에서는 김재규가 '재야 대통령'으로 불리며 박정희 정권에 맞선 장준하(1918~1975)와 한국 사회 민주화를 위한 밀약을 맺었다는 '밀약설'도 관심을 모은다.
한 교수는 "(김재규의 심경 변화는) 생각보다 오래 된 것 같다"며 "장준하 선생과의 밀약설도 나오고, 유신 체제가 시작됐을 당시 군단장이던 김재규가 박정희를 연금하려 했다는 이야기도 사실로 보인다. (김재규는) 특이한 인간형"이라고 설명했다.
심용환 역사N교육연구소 소장도 "김재규는 복합적인 인물"이라며 "'유신 체제가 과연 김재규의 행동으로 보다 일찍 무너졌을까'라는 물음에 대다수 학자들은 '그렇다'고 본다. 그의 가장 큰 공로는 (박정희를 암살함으로써) 부마항쟁에서 인명 희생이 나지 않도록 했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다만 심 소장은 "김재규는 군인으로서 누릴 것을 다 누렸고, 박정희 정권 아래 건설부 장관, 중앙정보부장과 같은 요직을 거친 협력자였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다"며 "뒤늦게 유신 체제의 위험성을 자각하고 그 체제를 무너뜨리려는 생각과 행동을 했던 사람으로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결국 "김재규는 박정희 정권과 적극적으로 싸웠던 사람들로부터 영향을 받고 감화된 인물이지, 반대로 그들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준 사람은 아니"라는 것이 심 소장의 지론이다.
영화 '남산의 부장들' 포스터 문구 표현을 빌리면, 박정희 정권을 향한 김재규의 '충성'이 '총성'으로 변한 까닭은 무엇일까.
한 교수는 "전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영화에서는 배우 곽도원이 연기한 박용각 캐릭터로 그려졌다)을 살해한 것이 김재규의 중앙정보부인데, 그것이 박정희를 향한 김재규의 마지막 충성이었다고 생각한다"며 "상식을 지닌 사람이라면 유신 체제가 잘못됐다는 것을 누구나 알 수 있었다. 김재규가 박정희와 특별한 관계였더라도 '이것(왜곡된 체제)을 어떻게 바로잡아야 할 것인가'라는 고민이 있었을 것"이라고 했다.
이어 "김재규는 박정희도 살리고 한국 민주주의도 살릴 수 있는 길을 고민했을 텐데, 부마항쟁이 일어나고 수천 명 목숨이 희생될 것 같은 상황이 벌어지면서 '박정희가 피를 흘리면 그것만은 막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며 "김재규는 적어도 광주학살과 같은, 시민들이 흘리는 피로 정권을 유지하려는 그릇된 행태는 막아야 한다는 것에 충실했던 사람으로서 재평가가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비슷한 맥락에서 심 소장도 "김재규는 역사 흐름 안에서 시민·노동자들이 일으킨 거대한 민주화 물결에 영향을 받은 개인으로 볼 수 있다"며 "그것이 김재규처럼 유신의 심장부에 있는 사람마저도 시대의 도전에 함께하도록 변화시킬 수 있었던 힘"이라고 전했다.
심 소장은 "박정희 정권 아래 이러한 비상식적인 일이 계속 벌어진 데는 군사쿠데타의 부작용이 큰 몫을 했다고 여긴다"며 "스스로 정당한 절차를 거치지 않은 채 집권했으니 그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정보정치' 등 상식을 벗어난 일이 이어진 것이다. 결국 '3선' '유신'이라는 기괴한 체제는 일그러진 구조의 산물"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