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일 때는 죄없이 죽여놓고 이제와 법을 따지나"

[신년기획] 새해에 과거를 묻는 사람들
6·25전쟁 민간인 학살 피해자 유가족 "왜 국가가 우리 아버지 죽였나" 진실 원해
"진상규명 위해서는 국회에서 과거사법 통과해야"
과거사법 2005년 한 차례 통과돼 활동했지만…"미신청자 많고 기간 짧아"
형제복지원·선감학원·서산개척단 사건 생존자들 "과거 덮은 국가 미래 없어"
피해자 고령 많고 증인·증거 사라져…"하루속히 명예회복 돼야"

2020년 새해가 밝았지만 여전히 과거를 묻지 못해 묻는(問) 사람들이 있다. 국가폭력으로 피해를 당한 지 수십 년이 지났지만, 보상은 고사하고 정확한 진상규명조차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CBS노컷뉴스가 국가폭력 피해 생존자들을 만나 그들의 절박한 목소리를 들었다.

지난달 31일 오전 서울 국회 앞에서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 피해자 유족 곽정례 할머니가 CBS노컷뉴스와 인터뷰 전 생각에 잠겨 있다. (사진=이한형 기자)
◇"죽일 때는 죄없이 죽여놓고 이제와 법을 따지나...아버지 살려내라"


곽정례(79)씨는 6·25전쟁 민간인 학살 피해자의 유가족이다. 전쟁 당시 총구는 남·북 군인간에만 겨눈 게 아니다. 일부 군경은 일반 시민을 향해서도 총구를 겨누곤 했다. 전남 해남에서 자동차를 만들던 곽씨 아버지는 영문도 모른 채 당시 경찰에게 총을 맞아 사망했다.

곽씨는 "당시 거무튀튀한 사람들이 집으로 찾아와 총으로 아버지를 겨누면서 끌고 가려고 했다. 아버지가 문을 붙들고 안 나가려고 하니까, 억지로 끌고 나가더니 왼쪽 가슴과 왼쪽 눈에 총을 쐈다"라고 당시를 기억했다.

이어 "어릴 적 그걸 보고 온몸이 굳어버렸다. 이후에 한 번도 소리 내 웃지를 못하는데, 코미디를 봐도 웃음이 나오질 않는다"고 말했다.

곽씨가 바라는 것은 딱 하나다. 국가가 당시 "왜 우리 아버지를 죽였는지" 진실을 알고 싶다는 것. 지난 2005년 한 차례 이뤄진 과거사위 활동으로 국가로부터 배상은 받았지만, 그는 배상이 아닌 국가에 '진실'을 요구한다.

곽씨는 "그때 당시에 왜, 도대체 무엇 때문에 우리를 유가족으로 만들었나. 대체 무엇 때문에 민간인한테 그렇게 한 거냐. 정부에서 밝힌 내용은 하나도 없다"며 "나중에 재판에 갔을 때, '법으로 시효가 지났다'는 얘기를 듣고는 어이가 없었다. 죽일 때는 죄없이 죽여 놓고 이제와 무슨 법을 따져가면서 하냐"라고 울부짖었다.

지금도 국회에서 1인 시위 중인 곽씨는 2020년 새해엔 반드시 과거사법이 국회를 통과하기를 염원하고 있다. "4월 13일이면 20대 국회가 끝인데, 그 전에 통과됐으면 좋겠다. 1~2월 안에 통과돼 우리 유족들이 가슴 펴고 살 수 있는 날을 기대한다"고 곽씨는 전했다.

지난달 31일 오전 서울 국회 앞에서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 피해자 유족 곽정례 할머니가 6.25 전쟁 민간인 학살 진실규명 피켓을 들고 있다. (사진=이한형 기자)
◇노무현 정부 시절 '과거사법' 제정돼 일부 진실 규명 이뤄졌지만..."아직 부족"

지난 2005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과거사법)이 국회에서 통과됐다. 이에 따라 당해 12월부터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위)'가 출범해 2010년까지 약 4년 2개월 동안 활동했다.

이 기간에 신청사건을 비롯해 총 1만1175건이 처리됐고, 이 중 8450건의 진실이 규명됐다. 하지만 신청 기간이 1년밖에 되지 않은 데다가, 홍보 부족으로 많은 사람이 미처 접수를 하지 못했다. 역사정의실천연대에 따르면 미신청 인원이 파악된 것만 약 3천명이 넘는다.

한국전쟁유족회 김복영(70) 회장은 "2005년 과거사법이 제정되고 위원회가 꾸려졌지만 홍보 활동이 제대로 안 돼 진실 규명 '시도' 자체를 하지 못한 유족들이 많다"고 꼬집었다. 이어 "사람들이 6.25 민간인 학살에 관심이 거의 없고 (사실을) 모른다"며 "전쟁 중에 국민을 학살한 것은 정확히 밝히고 넘어가야 한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피해 생존자들이 고령이라는 점이 과거사법을 '하루속히' 통과시켜야 하는 이유다. 곽씨는 "과거에는 동네 증인도 많았지만 지금은 증인도 별로 없다. 이제는 (주변에 물어보면) '잘 몰라'하는 소리가 더 많다"고 하소연했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의 과거사위원장을 맡고 있는 이동준 변호사는 "피해자 중 고령인 분들이 많은데, 하루라도 빨리 그분들이 갖고 있는 상처나 짐들을 위로해 드릴 필요가 있다"면서 "시간이 지날수록 증거도 사라지고 피해자가 이런 일을 겪었다고 말해줄 수 있는 증인들도 하나둘씩 돌아가시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형제복지원 피해자 최승우씨가 지난달 27일 서울 국회 정문 앞 형제복지원 노숙 농성장에서 CBS노컷뉴스와 인터뷰 전 생각에 잠겨 있다. (사진=이한형 기자)
◇형제복지원·선감학원·서산개척단 피해 생존자..."과거 덮은 국가는 미래도 장담 못해"

진실화위의 활동이 끝난 이후 새롭게 불거진 국가 폭력에 의한 인권침해 사건 역시 과거사법 통과가 필요한 이유로 꼽힌다. 대표적으로 부산 형제복지원 사건과 충남 서산개척단 사건, 그리고 경기도 선감학원 사건이다.

2년 넘게 국회 앞에서 노숙 농성 중인 형제복지원 피해 생존자 최승우(50)씨는 "과거사법은 여야 정쟁적인 사건이 아니다. 국가가 잘못 없는 국민의 인권을 짓밟은 사건인 만큼 정부와 국회가 해결해야 한다"라며 과거사법의 통과를 강력하게 촉구했다.

이어 "국가폭력의 피해는 본인뿐만 아니라 트라우마 전이로 주변 사람들에게까지 옮겨 간다"며 "국가가 과거를 덮어버리면 현재도, 미래도 장담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소년판 삼청교육대'라 불린 경기도 선감학원 사건의 피해 생존자 김영배(65)씨 역시 "2005년 과거사법이 제정되고 꾸려진 위원회 활동이 끝날 무렵에 알게 되는 바람에 접수 자체를 못했다"면서 "법이 통과돼도 위원회 구성부터 피해자 조사에 이르기까지 수년이 걸리는데 그 동안 연로한 피해자들이 세상을 뜨지 않을까, 그게 두렵다"고 토로했다.

이들은 무엇보다 명예가 회복되기를 바란다. 서산개척단 피해 생존자 정영철(77)씨는 "우리는 젊은 청춘을 바치고 갈기갈기 찢겼다"고 울먹이며 "피해자들이 억울하게 살았으니 '정부가 잘못했다'는 소리만 들어도 만분이 풀릴 것 같다, 과거사법 통과로 '진실 규명'이 돼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피해자들을 옆에서 지켜보는 이 변호사는 "과거사 피해자 중에는 아버지가 어딘가로 끌려가는 등 가장이 갑자기 사라져 생계에 어려움이 찾아 온 경우가 많다"며 "뿐만 아니라 당시 분위기상 '빨갱이 자식이다'라고 손가락질과 차별적인 대우도 받게 된다. 국가의 배상과 명예회복이 꼭 필요한 이유"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재심을 받아 무죄 판결을 받은 분께서 이런 말씀을 하시더라. '다가오는 명절 제사를 지낼 때 이 판결문을 가져다 놓고 가족들이랑 한 번쯤 이야기하고 싶다. 이걸로 우리가 어려웠던 시간들이 다 보상 받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아버지가 잘못해서 그 고초를 겪으시고 우리가 힘들었던 것은 아니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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